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시범 (문단 편집) === 독립운동 ===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일어난 [[3.1 운동]] 당시,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조카 김장환(金章煥, 1902 ~ ?)[* 김시범의 셋째 형 김시학(金時學)의 아들이다.]이 경성부에서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3월 15일 귀향했다. 이때 김장환이 3.1 운동에 대해 친척들에게 알리자, "우리도 대한민족이다. 독립운동에 결사 진력해 보자"고 말하며 선두에 서서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8촌 삼종형(三從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600|김시은]](金時殷)을 비롯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596|고재륜]](高載崙)·[[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67|김연배]](金年培)·[[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597|황진식]](黃鎭式)·[[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488|백응선]](白膺善)·[[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594|박두규]](朴斗圭)·[[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330|이문천]](李文千)·[[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595|김희수]](金熙洙)·[[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598|김경희]](金慶熙)·[[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593|김필원]](金弼遠)··김영배(金塋培)[* 이명 김형범.]·김찬용(金燦容) 등 12명의 동지를 포섭했다. 이어 조천리 '미밋동산[*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1142-1번지에 있는 '[[https://naver.me/5zJw61zE|조천만세동산]]'을 말한다.]'에 올라가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신촌리, 신흥리, 함덕리 등 인근 주민들과 연락하기로 했다. 그리고 서당 학생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맏형이자 이름난 선비였던 만취(晩翠) [[https://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8977|김시우]](金時宇, 1875 ~ 1918)이 별세한 지 1주년 되던 3월 2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후 3시, 김시은, 고재륜 등의 동지들을 비롯, 인근 주민들, 서당 생도 등 약 500~600명의 시위대가 조천리 미밋동산에 모였고, 김시범은 미리 준비한 큰 태극기를 미밋동산 마루에 세운 뒤 목 메인 음성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조카 김장환이 앞에 나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태극기를 손에 들고 큰길로 나서자, 황급히 출동한 수십 명의 [[일본 제국 육군]] 무장대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김시범을 비롯한 13명의 동지들은 모두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조천만세운동은 3월 24일까지 3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되었고, 김시범은 김시은과 함께 최고형인 징역 1년형을 받았다. 1919년 4월 26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82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28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수형인명부]]에는 1933년 5월 30일로 오기돼 있다.]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여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80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302&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수형인명부]]에는 [[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기재돼 있다.]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79&evntId=0034984094&evntdowngbn=Y&indpnId=000001563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천만세운동)]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시범(1919년).png|width=100%]]}}} || ||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20년 4월 8일에 [[http://db.history.go.kr/id/ia_0993_0754|가출옥한 뒤]] 동지 14명이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고, 동미회의 첫 사업으로 1920년 3월 28일 25세의 나이로 요절한 항일운동가 백응선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이때 김시범은 묘비문에 일제의 연호인 [[다이쇼 시대|다이쇼]](大正) 9년을 쓰지 않고, [[단군기원]]인 4,253년을 썼다고 한다. 이후 김연배와 함께 한문 사숙이나 야학을 통해 후학을 양성했고, 조천 소비조합 운동에도 참여해 임원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이어 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