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시범 (문단 편집) === 광복 후 === [[8.15 광복]] 후 [[미군정]] 시기인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조천면장,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위원장, 1946년에 결성된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부의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또한 1947년 2월 26일 조천중학원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투쟁준비위원회에서 조천면 부위원장에 취임했고, 3월 1일 당일에는 조천국민학교 기념식을 주관했다. 이날 제주북국민학교 앞에서 발포사건이 일어나자, 3월 11일과 3월 13일에 각각 조천면사무소 파업투쟁위원회 책임자, 조천면 대책위원회 책임자 등에 취임하면서 3.10 총파업에도 가담해 2천여 명에 달하는 조천면민 집회를 열기도 했다. 결국 파업을 주도한 책임으로 인해 검거된 뒤 1947년 4월 18일 [[제주지방법원|제주지방심리원]](現 [[제주지방법원]])에서 미군정 포고령 위반 혐의로 3,000원의 벌금형을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011|선고받았다]]. 1947년 7월에는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 박경훈 전 제주도지사가 의장으로 있었다.] 부의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들로 인해 [[제주 4.3 사건]] 발발 이후 꾸준히 경찰의 지목을 받았고, 결국 토벌대에 의한 검속으로 연행돼 [[1948년]] [[11월 25일]] 조천면 함덕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3740&docId=763554&categoryId=44174|서우봉]](犀牛峰)에서 총살당했다. 장녀 김옥희[* 이명 김영원.]는 제주 4.3 사건 당시 조천면 여성동맹 부위원장으로 있었는데, [[한라산]]에 입산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토벌대에 체포돼 [[공개처형]]되었고, 아들 김언환과 김추환 또한 총살당했다. 장남 김상환은 [[행방불명]]되었고, 부인 신경보(愼敬輔)는 홀로 살아남아 김상환의 부인인 맏며느리와 손자들을 보살피며 집안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http://jejuhistory.co.kr/bbs/view.php?id=local&page=20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01|2864번지]]에 안장되었다가, 2010년 조천읍 대흘리 가족묘지에 이장되었다. 2023년 10월 17일, 1947년의 3.1 기념식에 참가, 주도했다는 이유로 3000원의 벌금형을 받은 것으로 [[제주 4.3 사건]] 일반재판 재심 대상자로 선정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제주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김씨]][[분류:1890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제주 4.3 사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