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신조 (문단 편집) === 1.21 사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A ] [[정찰총국|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북악산을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종로구)|신영동]] 세검정 즈음에 있던 [[고개]]. 현재의 자하문 고개로 사건을 언급한 비석과 사망자의 동상이 있다.]까지 침투하였다. 침투조 중 하나였던 그는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른 공비들이 사살당하던 와중에[* 28명은 사살되었고 2명은 북한으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된다.] 김신조는 검문을 피하기 위해 독립가옥에 숨어서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 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 발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독립가옥에서 김신조를 발견하였다. 상당한 교전을 주고받다가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니 결국 김신조는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떨어트리고 손 들고 나왔다.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마자 '무기는 어디에 숨겨뒀냐?'고 물었다. 김신조의 직접 안내로 특공대원 25명은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 시의 일부 장비를 회수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파일:attachment/1.21사태/2008070600935_1.jpg]] [youtube(brnG16W5SmY)] >'''[[간첩|우리]] 31명 임무는... 저 청와대 내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모가지 뗄 임무]]고...(영상의 1분46초)''' >---- > 생포 직후 김신조 이 말은 [[기자회견]]에서 나온 건데 [[http://cfile203.uf.daum.net/image/190B42584D3969041ACD3D|이때]]의 모습과 체포 당시의 얼굴이 약간 다르다. 기자회견 때 모습이 좀 살이 붙었는데 방첩대원에게 두들겨 맞아서 얼굴이 부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지금은 종영된 예능인 [[MBN]]의 [[고수의 비법 황금알|황금알]]에서 나온 증언에 따르면 당시 생포당해서 가뜩이나 [[빡]]쳐 있는데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은 채 수갑을 채우고 의자에 앉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다른 공비들이 전부 사살당하거나 북으로 도주한 와중에 본인만 유일하게 투항하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중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이 실시간으로 전국으로 생중계되었고 전 국민이 기절초풍했다. 웬만해선 정치에 개입을 안 하던 [[육영수]]가 [[방첩대]]에 한 마디 하기까지 했다. 해당 발언은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은 채 수갑 채우고 의자에 앉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한편 북에선 김신조가 투항하여 남한에 귀순했단 정보를 얻자 북한에 있었던 가족들이 [[수용소]]로 압송되어 오랫동안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귀순자들에 의하면 김신조의 가족 중 일부는 [[사형]]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