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약수 (문단 편집) == 생애 == 1890년 [[경상도]] [[기장군|기장현]](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의 평민 가정에서 김은홍(金殷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양|한성부]]로 상경하여 북서 가회방 재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 거주하였으며, [[휘문고등학교|휘문의숙]]과 [[서울공업고등학교|관립경성공업전습소]] 응용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과 [[중국]]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다가 1915년 12월 중퇴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기장 광복회 회장직을 맡았다. 1918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난징대학]]의 전신인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재학하던 중 [[김원봉]]을 만나 이름을 약수로 개명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김원봉과 헤어져 이여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니혼대학]] 사회과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1년 11월 21일 일본에서 흑도회 단체를 결성, 조직하고 기관지 『흑도(黑濤)』를 발간하였다. 취지는 한국의 현실을 양심적인 일본인에게 전달하는 것, 국가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가 없는 세계융합을 실현하는 것 등이다. 1922년 10월 흑도회가 사상적으로 분열하여 박열 등은 지배 세력으로부터 각개전투 형식의 직접적인 파괴와 암살, 혼란과 무질서 등을 주장하며 무정부주의 아나키스트들은 흑우회(黑友會)를, 1922년 12월 26일 일본 동경에서 김약수 등의 공산주의자는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했다. 흑우회의 항일노선보다 경도된 노선이었다. 선전 강령은 한국 프롤레타리아와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결합을 굳게 하며, 재일조선인노동자의 단일조합을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북풍회(北風會)는 북성회(北星會)의 국내지부로서 1924년 11월 25일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북풍회는 창립과 동시에 [[코민테른]]의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관 책임자 인데르슨에게 보고하였으나 승인받지 못하였다. 북풍회는 이 배후에는 비밀 단체인 까엔당(КНДан)이 존재하였다. 1924년 4월 17일 조직을 창립했다. 그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당시 사회를 봤고, [[조선공산당]] 인사부책을 맡았지만 [[조선공산당]] 결성 직후, 김약수는 화요회파와의 경쟁에서 밀려 그 해 10월 비판받고 당에서 제명당하였다. 곧바로 [[조선공산당]] 결성 소식을 접한 일본경찰의 첩보망에 포착, 조선공산당원 검거에 걸려 재판받고 수감, 6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약수.png|width=100%]]}}} || || {{{#cfa547 '''△ 1928년 7월 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31년 6월 6일 출옥하였고[[http://db.history.go.kr/id/ia_0666_0764|#]] 1942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로부터 조선임전보국단 가입을 권고받았으나 거절했다가 수개월간 구금되었다. [[8.15 광복]] 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나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에 의해 건준이 좌경화 되자 건준을 떠나 [[한국민주당]] 조직에 가담했다. 그러나, 한민당의 정치 노선에 싫증을 느꼈다. 이에 1946년 10월 탈당하여 [[김규식]] 계열 노선을 따르고 [[좌우 합작 운동]]에 투신하였다. 1947년 좌우합작위원회와 건민화를 중심으로 통일전선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조봉암]], [[안병무(1912)|안병무]] 등과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조선불교교무원 [[김법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다가 이승만 정권의 미움을 샀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고 국회부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항소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하였다. 1956년 반 [[김일성]] 운동을 하다 [[8월 종파 사건]] 때 숙청되어 산골로 추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