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양 (문단 편집) == 생애 == [[태종 무열왕]]의 9세손(8대손). 열조 [[원성왕]](제38대)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린 무열왕 방계 후손인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신라)|김주원]]의 증손자이다. 김주원의 맏아들 [[김종기]]의 아들인 김정여의 아들이 바로 김양이다. 신라 중대가 끝나고 하대로 접어들면서 무열왕계 왕통은 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지만 김양의 집안만은 제법 위세를 떨쳤다. 특히 [[헌덕왕]](제41대) 때 김주원의 둘째 아들인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김헌창의 난]] 참조)이 실패하고, 그 혈족이 몰살당했는데도 김양의 집안은 큰 피해가 없었는지 아버지 김정여는 4등급인 [[파진찬]]까지 지냈다. [[김흔]]의 사촌동생이었다. 김양 본인도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고성군(경상남도)]] 태수, 중원([[충주시]]) 대윤, [[무주]]([[광주광역시]]) 도독 등 지방 관직을 수 차례 역임하면서 다스리는 곳마다 행정능력이나 근무실적이 뛰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흥덕왕]](제42대)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왕실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는데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김균정의 조카인 김제륭(후의 [[희강왕]])이 대립했다. 이 다툼에서 김양은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후의 [[신무왕]])과 함께 김균정을 적판궁으로 모시고 가 왕으로 받들고 김균정을 호위했지만 김제륭의 군사들이 곧 김균정이 있던 적판궁을 포위하자 화살을 쏘아 10여 사람을 맞추는 등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제륭의 부하 [[배훤백]](裵萱伯)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고 부상당했다. 결국 수세에 몰리자 김균정은 김양에게 후일을 도모하라며 그를 탈출하게 했고, 김양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사이 김균정은 결국 김제륭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양은 크게 통곡하고는 태양을 가리키며 복수를 다짐하고 산야에 은둔했다. 그러던 중 간신히 살아남은 김우징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했다는 소식을 듣자 김양도 병사를 모집하여 자신도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고 거사를 도모했다. 그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중앙 조정에서는 다시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희강왕(김제륭)이 자진하고 희강왕을 지지했던 [[민애왕]](김명)이 즉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우징은 그 틈을 노려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 마침내 거병했으며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아 [[장보고]] 휘하 청해진 군대와 함께 민애왕의 관군을 연전연파했다. 장보고는 이 때 부장 정연에게 5,000명의 병력을 내 주어 김양을 도왔다. 이 병력이 청해진에서 서라벌까지 진격해가며 정부군을 무너뜨리는데, [[청해진]]군이 정예병이라 잘 싸운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신라 중앙군의 전투력도 오랜 평화기를 보내며 어지간히 막장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무튼 무주와 남원을 거쳐 달벌(현재의 대구)에서 벌어진 [[달벌대전]]에서 그 5,000여명으로 무려 20배에 달하는 100,000명의 신라 중앙군을 괴멸시켜버리고[* 10만 대군 중 반절이나 죽었고 그 외 다수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민애왕 측의 저항 능력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후 반군을 피해 별궁으로 도주하던 민애왕을 붙잡아 시해하여 김균정의 복수를 이루고 김우징을 [[신무왕]](제45대)으로 옹립시켰다. 전란 이후에는 민심의 수습에 힘썼다. 이 때 김양은 과거에 자신의 다리를 화살로 쏘아서 맞추었던 배훤백을 불러서는 이렇게 말했다. >"개는 각기 그 주인이 아니면 짖는다.[* [[전한]] 때 [[한신]]의 참모였던 [[괴철]]이 [[고제(전한)|유방]]에게 붙잡혀 가서 했던 말이 원전이다.] 네가 그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나는 따지지 않겠으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한마디로 배훤백을 용서했다는 의미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배훤백이 저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냐며 모두 안심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유방이 자신을 배신한 옹치에게 포상하여 부하들을 안심시켰다는 고사와 구조가 같은데 김양이 이를 알고 써먹었는지는 불명.] 이후 신무왕이 즉위한지 1년도 되지않아 승하하고 그 아들인 [[문성왕]]이 즉위했다. 이후로도 김양은 승진을 이어나가며 권세를 누렸다.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였고, 오래지 않아 시중 겸 병부령으로 영전했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는 검교위위경을 제수했다. 더욱이 문성왕 4년(842)에는 김양의 딸이 문성왕과 혼인하면서 국구(國舅)가 되었다. 그야말로 국가의 공신이자 실세로 대접받으며 산 것이다.[* 비슷한 처지였지만 왕위를 탐내서 주군을 시해하고 본인이 그 자리에 올랐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김명(민애왕)과는 정반대가 되었다.] 아무튼 영화로운 말년을 보내다가 문성왕 19년(857)에 50세의 나이로 집에서 사망했다. 부음을 들은 문성왕은 애통해하며 김양에게 제1관등인 각간([[이벌찬]])을 추증했고, 장례 절차는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르게 했으며 무덤은 태종 무열왕의 능역에 함께 장사지냈다. [[복수귀]]같이 살다가 결국 복수에 성공하여 승승장구했고 죽어서까지도 최고의 예우로 대접받은 후덜덜한 인물이다. 그리고 김양이 죽은 그 해의 한 달 뒤인 9월에 사위인 문성왕도 승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