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만(교수) (문단 편집) == 경력 == 한국 종이[[공작]]계의 [[선구자]] [[거장]]으로서 종이공작을 대중에게 널리 보급한 인물이다.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그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간 색종이 세트와 미술 문구류들이 나왔고 많이 팔렸다.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 출생자들에게는 학교에서 늘 사용하는 문구류와 색종이 등에 김영만의 얼굴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 정도. [[홍익대학교]] 도안과(현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대우실업(현 [[포스코인터내셔널]])에 취직해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09년도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졸업 후 대우전자 광고 선전실에서 일했다고 하지만, 5년 만에 나왔다고 한다.] 퇴사 후 사업을 했다. 그러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 친구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했던 종이접기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귀국, 종이접기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무직이였던 그는 부인과 장인에게 "종이접기 해 보면 안되겠냐" 라고 제안했고, "딱 1년간 해 보라"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사립학교 특강에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이 길에 뛰어들었고, 1988년 KBS의 아동 프로그램인 [[TV유치원|TV유치원 하나둘셋]]에 출연하며[* 이전에는 유아미술학자 이인태 교수가 진행하는 미술교육 코너가 있었다.]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이후 [[뽀뽀뽀]], [[대교어린이TV]]의 '김영만의 미술나라',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 교육용 비디오 '김영만 선생님의 만들기 나라' 등에 출연하며 '김영만 선생님의 아트캠프' 등 각종 행사나 문화센터 등지에 특강을 수도없이 다니는 등 종이공작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사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를 [[국딩]]~[[초딩]] 시절로 보낸 이들[* 좁게 잡으면 1980년대 생 전체, 최대한 넓게 잡을 경우 1970년대 후반 생부터 1990년대 중반 생까지. 사실 1990년대 초중반 생들은 만들기 아저씨보단 불어펜 아저씨라고 해야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이라면, 농구 팬이 아닌 이상 [[김영만(농구)|농구선수 김영만]]보다 이 인물이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아동 프로그램에 출연 당시의 김영만의 인기는 요즘식 표현으로 ''''초통령''''이라 칭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했고 그 파급력이 오래 지속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TV유치원 하나둘셋]]은 월화수목은 다양한 코너로 진행하고 금요일은 인형극만 진행하면서, 금요일엔 김영만의 출연이 없었다. 그러자 어린 시청자들은 '''금요일에 하나둘셋을 보는 걸 매우 지루하게 느끼고, 어서 월요일이 와서 김영만 아저씨가 진행하는 종이공작 코너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등엔 인기 연예인들을 초청, 특집 컨셉으로 하나둘셋을 진행하다 보면 김영만 아저씨 코너가 생략됐는데, 아이들은 다정한 목소리의 만들기 아저씨가 나오지 않자 다른 유명한 연예인도 안 보고 유치원에 갈 정도였다. 이후 방송국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에 저 사람은 너무 나이가 많은거 아니냐.'는 이유를 들어 그를 [[TV유치원 하나둘셋]]에서 하차시켰으나, 추후 KBS 2TV에서 편성했던 어린이 프로그램 [[혼자서도 잘해요]] 등에 다시 한 번 출연해 2000년대 초반까지 어린이 시청자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돈 때문이다. 제작하는데 돈이 많이 드는 어린이 프로그램보다, 수입한 유아용 애니메이션 몇개로 때우는 게 돈이 덜 들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종이문화재단의 이사와 [[수원여자대학교]] 아동미술과 교수를 겸하고 있으며, 최근에도 [[종이접기]] 공작 [[DVD]]를 내놓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관성리에 "아트오뜨"라는 미술체험 학습장을 운영 중이다. 400번이 다니는 아우내장터 쪽에서 한참 북쪽에 있다. || [[파일:/image/025/2015/05/05/htm_201505050275030103011_99_20150505084103.jpg|height=300]] ||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5_667154_14367025212023327.jpg|height=300]] || ||<-2> '''[[리즈 시절]]''' || 참고로 위의 리즈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인기와 별개로, 수수한 차림새 때문에 역경을 딛고 열정으로 종이공작 장인이 된 뒷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카더라. 그러나 사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서울예술고등학교|서울예고]] - [[홍익대|홍익대 미대]] 코스를 밟은 엘리트 미술인'''이다.[* 다만,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대학에 들어갈 즈음에 집안이 기울어서 스스로 학비를 충당했고, [[일본]] 유학 시절에는 운전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역경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오죽하면 종이공작 관련 사업에 나서게 되자, 그의 대학 동기들이 "학교 망신이다."란 소리를 했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이 된 지금을 생각하면, [[대기만성|역시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