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만(농구) (문단 편집) == 프로 선수 시절 == [[파일:external/dimg.donga.com/6800395.1.jpg|width=300]] 전성기이자 에이스였던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 [[파일:김영만 선수 LG 시절.jpg]] [[창원 LG 세이커스]] 시절. [[파일:김영만 선수 동부 시절.jpg]] [[원주 DB 프로미|원주 동부 프로미]] 시절. [[파일:김영만 KCC 시절.jpg]] 현역생활 마지막팀인 [[전주 KCC 이지스]] 시절. 김영만이 실업 기아자동차에서 보여준 기세는 프로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김유택의 노쇠로 주축이 허동택에서 허동만으로 바뀐 기아자동차는 허재가 나래와의 결승전에 배제된 상황에서 강동희, 김영만의 맹활약으로 1997년 프로 원년의 우승을 차지했고, 97-98시즌 준우승, 98-99시즌 준우승의 순항을 이어가게 된다. 현대에 빼앗긴 두 차례 준우승이 뼈아픈데, 사실 강동희-김영만의 백코트는 이상민-추승균에 그다지 밀리지 않았고 3번만 놓고보면 김영만이 추승균을 압살했으나, 현대 맥도웰의 인사이드가 워낙 강한 나머지 김유택이 은퇴한 자리에 나래에서 준우승 주역이었던 윌리포드를 야심차게 보강했으나 98-99시즌에도 밀리고 말았다. 김영만의 기세는 프로 초기 5년간 그야말로 3번 자리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5년 간 평균 15점 이상을 기록했고, 이 중 4시즌은 평균 20득점 이상, 세 시즌 연속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강동희]]~~와 호흡을 맞춰 팀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비록 우승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지만, 기아자동차를 KBL의 정상권 팀으로 남기는데 큰 공헌을 했다. 수비력도 극강이라서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은 도저히 김영만의 수비를 뚫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김영만의 적수는 거의 없었다. [[추승균]][* 하지만 몇 년 후에는 김영만을 잡기 시작한다.], [[문경은]][* 무득점으로 묶인 경기가 유독 많으며 김영만 밥으로 불리우기도...], [[우지원]][* 아예 공을 못잡았을 정도...] 모두 김영만에게 잡혔었다. 하지만 [[양경민(1972)|--양경민--]][* 보통 한자리수 득점으로 묶이면서 두자리수 득점을 허용하였으며, 양경민에게 무득점으로 묶인 경기도 있었을 정도... 하지만 그 양경민은 추승균에게 약했다. 추승균>김영만>양경민>추승균같은 뫼비우스의 띠...]에게는 이상하게 약했다.[* 크고 강한 육체로 밀어붙이는 전법이 1cm가 더 큰 양경민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양경민은 본인보다 약간 빠르고 체력이 엄청난 추승균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 원리는 김승현>신기성>이상민>김승현의 뫼비우스 띠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김영만의 기량은 이 프로 초기 5년을 후에는 끝없이 하락한다. 이미 1999-2000 시즌에 무릎 부상을 당하며 평균 20득점이 넘던 기록이 17점대로 하락했는데, 2000-01 시즌에 다시 평균 22.8점을 찍으며 부활했다. 그러나 그 부활은 무릎의 제대로 된 재활 없이 거둔 위험한 부활이었다. 그 후유증은 그 이듬 해 그대로 나타났다. 무릎이 다시 고장났고, 여기에 허리 부상까지 겹치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팀 성적도 마찬가지로 곤두박질쳤다. 사실 99-00시즌 플옵에서 강동희 김영만이 모두 빠진 채 개망신을 당한 나머지, 재활이 덜 끝난 김영만을 다음 시즌이 되기 무섭게 불러낸 [[박수교]] 감독이 문제였다. 결국 2002년 박수교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퇴진하고, 기아자동차에서 구단 간판도 모비스로 바뀐 상황에서 새롭게 부임한 인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성기를 이끈 [[최희암]] 감독이었다. 그는 부임하기 무섭게 구 중앙대 출신 멤버들을 퇴출하고 팀을 연세대 라인으로 싹 갈아치우는데, 이는 후일 유재학 감독이 연착륙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최희암 감독 체제 아래서 기아자동차의 흔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강동희]]~~는 팀을 떠났고, 김영만도 [[우지원]]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 옛 스승인 [[최인선]] 감독 밑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김영만 입장에서는 배신인 것이 2001년 연봉 삭감도 감수하면서까지 팀에 남았던 상황에서 트레이드로 뒤통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SK에서 복수를 다짐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기량은 나오지 않았고, 여기에 팀원들과의 불화설까지 나오면서 김영만의 입지는 좁아졌다. 결국 [[중앙대학교]] 출신 선수들이 많던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했고, ~~[[강동희]]~~ [[조우현]]과 함께 트리오를 이루면서 전성기만큼은 못해도 팀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김태환 감독이 팀을 떠나는 시기와 함께 김영만의 전성기도 완전히 끝났다, [[중앙대학교]] 출신 선수들이 많던 팀 색깔도 [[신선우]] 감독의 등장 이후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FA를 선언하며 현역 시절에 전성기를 함께한 ~~[[강동희]]~~가 코치로 있는 [[원주 DB 프로미|원주 동부 프로미]]로 이적하여 재기를 모색했지만, 이것도 실패하자 시즌 도중 [[전주 KCC 이지스]]로 3:3트레이드[* 전주 KCC get: 김영만, [[정훈(농구)|정훈]], [[배길태]] ↔ 원주 동부 get: [[표명일]], [[변청운]], [[백주익]]]되어 이번에는 [[허재]] 감독과 함께 재기를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모교인 중앙대에서 코치 제의를 받자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서 은퇴식을 치르고 은퇴했다. 부상이 아니었다면, 버림받지 않았다면 더 잘 했을 수도 있었던 선수. 전성기는 정말 공격과 수비 모두 3번 자리에서 최고였던 선수다. 1:1에 능했던 거의 최후의 국내 3번 선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 개인 기량도 뛰어났다. 물론 부상 이후에는 [[저니맨]]으로 전락해 커리어의 오점이 되었다. 부산 기아자동차 시절에 국내선수 역대 최다득점 '''49득점'''을 기록했고 22년이 지난 2019년에 [[서울 SK 나이츠]]의 [[김선형]]이 49점으로 타이기록을 세웠다. [[우지원]]과 [[문경은]]의 기록은 조작된 기록으로 인정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김영만과 김선형이 최다 득점을 기록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