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삼/일생 (문단 편집) == 정계 입문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oung YS.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isainlive.com/24882_48794_1933.jpg|width=100%]]}}}|| || 서울대학교 졸업사진. || [[1951년]] 9월 29일, 훗날 영부인이 되는 [[손명순]]과 함께 찍은 서울대 졸업 기념사진.[* 지금의 미관(美觀)으로 봐도 확실히 준수한 외모를 갖춘 미남이었다.] || 1947년 9월[* 당시는 미군정의 영향으로 9월 학기제였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일각에서는 청강생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서울대에서 정식 입학 및 졸업생으로 발표함으로써 논란은 종결되었다. [[:파일:김영삼 성적표.jpg|김영삼의 대학교 성적표]][* YS 생가에 전시되어 있다. GPA가 1.07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웅변 대회에 2등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의 웅변 실력에 감탄한 [[장택상]]과 가까워지게 되며, 후에 장택상의 선거 운동에 도움을 주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의용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웅변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훈병]]으로 배치된다. 전쟁이 끝난 후, 김영삼은 그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장택상의 비서가 됐다. 그후 장택상은 국무총리가 되었고, 김영삼은 인사담당 비서관이 됐다. 1953년 9월 장택상이 총리직을 사퇴하고 김영삼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에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나라를 흔드는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당하겠느냐"'''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마 결심을 굳힌 김영삼은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던 [[이기붕]]의 입당 교섭에 따라 자유당 공천을 받아 만 26세 5개월[* 1927년 12월 20일 출생, 1954년 5월 20일 선거에서 당선.]의 최연소 기록으로 현역 국회의원인 무소속 [[이채오]] 후보를 누르고 거제군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때 그가 세운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깨지지 않고 있다. 2위가 만 26세 6개월인 [[전휴상]].[* 김영삼 대통령은 26세 5개월.] 참고로, 공직선거법 제 16조 2항에 따르면 18세 이상이어야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생긴다. 이것도 21대 국회에서 피선거권 연령을 낮춰서 된 것으로, 그 전에는 만 25세 이상이어야 했다. 참고로, 역대 최고령 국회의원 당선자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전국구 1번에 출마해 당시 만 84세의 나이로 당선된 [[문창모]] 의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