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삼/일생 (문단 편집) === 정치 초년생 시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12130203.jpg|width=100%]]}}}|| || 풋풋하던 시절의 김영삼(우측), 좌측은 그의 동지이자 라이벌 [[김대중]]. ||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이승만]]의 대통령 3선 제한 철폐에 반대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노린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민관식]] 등 동지 10명과 자유당을 탈당해[* 이는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재현되기도 했다.]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했다.[* 참고로,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의 당이 이 1955년의 민주당에서 시작됐다고 보며(물론 그 이전에 [[한국민주당]]을 뿌리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창당 60주년 행사를 2015년에 하거나 9월 18일을 당 설립일로 기념한다.] 초선 의원 임기가 끝나자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서구(부산)|서구]] 갑에 출마하지만, 자유당 [[이상룡(1911)|이상룡]]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 구파인 [[조병옥]]을 지원하였다. [[4.19 혁명]]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재기한다. 1960년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됨으로써 다시 여당 의원 생활을 하게 되지만, 민주당 구파 일부가 탈당해 [[신민당(1960년)|신민당]]을 만들 때 김영삼도 신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1960년 9월 25일 무장공비 이정섭(당시 25세)과 윤병윤(당시 47세) 등의 총격에 어머니를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본인으로선 정말 슬픈 일이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본인의 정치행보에는 이익이 됐다. 당시 한국의 군사정권은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람을 실제 그 사람의 정치성향과 상관없이 [[빨갱이]]로 모는 경우가 흔했는데, 북한의 무장간첩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 '빨갱이'가 됐다는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향이 군부독재 정권자들과 같은 경상도라는 것도 한 몫을 했다. 부울경 사람들조차도 김영삼의 어머니가 무장공비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과 김영삼 본인도 철저한 반공주의라는 것을 알아서 색깔론을 펼쳐 폄하하려고 해도 무리가 있었다.][* [[김일성|물론 공산주의자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공산주의자로 자란 놈이 있다.]] --[[패륜]]--] 그래서 김영삼은 여타 야당 인사들과는 달리 [[종북몰이]]에서 다소 자유로웠다.[* 80년대 운동권 세대들 때문에 민주화 세력이면 다 좌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이전 세대들에서는 민주화 인사라고하여 다 좌파는 아니었으며 김영삼은 원래부터 보수 우파 성향이었다.] 당대 야권의 또 다른 간판 스타였던 [[김대중]]이 평생 '빨갱이'라는 소리에 시달리며 살았던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110800209103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11-08&officeId=00020&pageNo=3&printNo=12269&publishType=00010|당시 기사]]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김영삼/일생, version=245, paragraph=2.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