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삼/일생 (문단 편집) === 40대 기수 ===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군정의 실무를 맡은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필 본인이 직접 김영삼을 만나 새로 창당될 [[민주공화당]]에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김영삼은 '''“전부 다 군사 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라 [[http://mnews.joins.com/article/19115520|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김영삼 본인도 김종필의 첫인상에 대하여 그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군복을 입은 사람치고는 부드러운 인상을 보였다고 하며 비록, 입당은 거절했지만 서로 술 한 잔 나누고 헤어졌다고 훈훈하게 헤어졌다고 회고했다.][* 이 둘은 약 30년뒤 '''[[3당 합당]]''' 으로 인하여 같은 당에서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김영삼은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김대중과 달리 수감 이력이 없다는 식의 비교를 많이 하고는 하지만 이때 수감 경험이 있다.] 출소 후 1963년 민주당 구파 출신들이 [[민정당]]을 창당할 때[*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참여하였다. 이후 민정당, [[민중당(1965년)|민중당]], 신민당에 속하였다. 1969년 6월 20일 신민당의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와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던 중 [[김형욱|남산 멧돼지]]에 의해 자신이 탄 승용차에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이 사건을 정권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참조. 1971년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유진산 당수의 지원을 등에 업고 1차 경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과반 득표에 실패하면서 [[김대중]]과 1:1로 결선 투표를 치르는 2차 경선이 이어졌다. 그런데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이철승]] 쪽 표가 김대중에게 옮겨가면서 결국 김대중에 패배했다. 하지만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적극적으로''' 김대중을 지원하면서, 본인의 75년 차기 대선도 함께 준비하려 했으나, 7대 대선에서 간신히 승리해 다음을 보장할 수 없음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일으키면서 김영삼의 행보도 꼬이게 된다.[* 물론, 같이 도와준 2인자 김종필도 유신체제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었는데 박정희가 권력욕이 대단해 자신을 자꾸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아 불편해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10월 유신은 삼김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