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삼/일생 (문단 편집) === 연이은 정치 규제와 투쟁 === [youtube(guMJ7CyGTmY)] >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마음을 [[전두환]]이가 빼앗지는 못해!'''[br] >----- > 1985년 2월, [[전두환]] 집권 당시 가택연금을 선고 받고 나서[* 정확히는 전두환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쫒겨났던 김대중이 귀국했을 때, [[김포국제공항|김포공항]]으로 마중하러 가려했으나 군, 경들이 자택 앞을 가로 막았을 때의 일이었다.(전체 영상은 여기에 [[https://tv.naver.com/v/622208|볼 것]].)] [youtube(k32zaQwOaR4)][* 1980년 5월 20일에 방송된 독일 뉴스 [[Tagesschau]]에서 보도된 김영삼 소식, 8분 18초부터 시작.]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군부가 또다시 정권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일단은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시기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1967년)|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고 정치적 활동이 보장되는 시기였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재야 인사들은 새로운 군부 집권을 막으려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를 오가며 양자가 손을 잡도록 중재했으나, 일이 쉽게 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김영삼은 계속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한다. 지금 와서 보면 87년 분열의 단초가 여기에 이미 있었던 셈.] 김영삼 본인도 일단은 최규하 정부가 내세운 정치일정론에 반대하며 신속한 개헌을 주장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isaon.co.kr/2009091508164492.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3f91e10ba3f3f3a50822b215d75c82265e9fb45733d9f0d19563d931cff45e30.jpg|width=100%]]}}}|| 그러다 1980년 5월 17일 [[5.17 내란]]으로 인해 정치활동이 일체 금지되었고 곧 [[김영삼]]에게 가택 연금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김대중]]에게는 사형 선고, [[김종필]]에게는 보안사령부 감금 조치가 취해지는 등 명백한 정치탄압이 이어졌다.[* 자신의 민주화 투쟁 시기를 언급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 중 자택 연금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200~300명 가량의 기동대가 자신의 집을 애워싸고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김영삼의 말에 따르면 형무소도 친지나 변호사의 면회가 되는 반면 자택연금 기간 동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외부인과 일절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화 통화도 연금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겨 버렸으니 외부로의 연락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신군부는 이런 상황이 기사화되는 것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당시 김영삼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정치인 입장에서도, 일개 자연인 입장에서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던 모양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인 김홍조와도 짧은 안부인사 빼고는 제대로 통화하지를 못해서 가슴이 매우 아팠다고 한다. 아버지인 김홍조씨도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안부조차 제대로 물을 수 없어서 속상했다고 생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1980년 8월 13일에는 신군부의 강요에 의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신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민우(1915)|이민우]] 부총재를 당총재 직무대행으로 지명하면서 아예 정계은퇴까지 선언해버린 것. 당시 김영삼은 "나는 오늘 신민당 총재직을 사퇴함과 아울러 정계에서 [[은퇴]]할 것을 국민 앞에 밝힌다."고 말하고, "오늘의 정치상황에 처하여 야당 총재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모든 책임을 지고 이와 같이 결심했다."고 밝혔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81300329201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8-13&officeId=00032&pageNo=1&printNo=10730&publishType=00020|#]] 그리고 자신의 출신구인 부산서구/동구 지구당에 신민당 탈당계를 제출했다. 마치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은 후 전두환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해외로 도피해야 했던 것[* 물론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위기에 처한 김대중의 사정상 반성문은 강요에 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당시 신군부측은 김대중에게 비공개로 할 테니 전두환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제발 써달라고 애걸하였고, 김대중도 전두환의 체면을 위해 석방을 조건으로 써주었던 것인데, 신군부는 이 반성문을 바로 언론에 공개하는 치졸한 짓을 벌였다.]과 비슷하다. 이후로 김영삼은 5공 시기, 정치활동을 사실상 전면 금지당했다. 1981년 연금이 해제되자 가신 그룹인 상도동계를 주축으로 하여 정치규제에 묶인 인사들을 규합할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민주산악회. 그러나 1982년 4월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 헨리 스톡스와 북한산 산행을 하며 인터뷰를 한 것이 정치규제 위반이라는 이유로 두 번째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이 시기에 장남인 김은철의 결혼식이 있어,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485460241024451016|신군부 측에서 결혼식에 가도 된다고 회유했으나, 전두환에게 도움이 되는 짓은 안 한다고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이던 1983년 5월 18일부터 민주화 요구 5개항[*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였는데, 이것을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전두환 정권의 어떠한 회유도 뿌리치며 23일간 단식 농성을 벌인 결과, 본인의 가택연금 해제를 포함, 일부 억압적 조치의 완화를 받아내었고, 6월 9일에 단식 농성을 중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