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삼/일생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시절 === [youtube(M8gcb4hLgnc)] [youtube(8mIcJMdzdmA)] [[김영삼 정부]] 5년은 실로 드라마틱한 시간이었다. 취임 초기 문민정부라고 명명하며 시작하려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하나회]]는 군 인사를 자신들 임의대로 결정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내미는 등 문민정부를 길들이려 했지만 상대를 단단히 잘못 고른 셈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하나회]]를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했고, 취임 일주일 만에 [[대장(계급)|대장]], [[중장]], [[소장(계급)|소장]] 상관없이 군 파벌의 핵심 하나회 소속 별을 40개 넘게 떨어뜨리며 본격적으로 숙군 작업을 시작한다. [[하나회]] 소속 군 장성 입에서 '''"군을 너무 홀대한다. [[무신정변|무신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가?"'''라는 발언까지 나올 만큼 반발이 심했지만[* 물론, 무신의 난으로 비유한 하나회 자체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무신의 난은 무인의 차별도 있었지만 그 당시 문인들은 지금으로 따지자면 군상부층에 속한 계급으로 행정과 군사안보 분야까지 담당한 것이기에 무신의 난은 주류인 고위 장교 vs 비주류 야전군 장교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이지, 국가가 군을 소홀히해서 벌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신정변으로 인해 생겨난 무신정권은 결국은 고려를 멸망으로 이끌었는데 하나회의 주장대로라면 하나회가 무신정권과 같이 대한민국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김영삼]]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는 반박으로 응수하며 하나회 정리 작업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후임인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무렵에는 영관급 장교 몇 사람만 남아 대부분 장성 진급 없이 전역했을 만큼 하나회 파벌의 세는 급격히 줄어들고 말았다.[* [[김현집]] 한미연합부사령관, [[최익봉]] 前 특수전사령관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 김현집(충남 보령 출신)은 작전전문가로 실력이 확실한 사람이었으며, 최익봉(경북 의성) 역시 영관급 장교로서는 드물게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2042559358|전시가 아닌 평시에 외국군에 수여할 수 있는 최고 훈장인 미국 공로훈장(LOM)을 받아]] 실력을 입증한 바 있다. 또한 이들은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하나회 끝물이었기에 살아남았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25기인 [[안광찬]]과 [[황진하]]는 모두 끝까지 살아남아서 군 [[장성급 장교|장성]]으로 예편하고 [[정치인]]이 된다.] 동년(1993년) 8월에는 사전 예고 없이 [[대통령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 검은 돈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 부정을 저지른 이력이 있는 정치인, 기업인들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이 와중에도 대통령 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화통한 인심을 베풀었던 [[전두환]]은 신세를 졌던 관료들이 미리 귀띔을 해주어 치명상을 피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했는데, 비록 발표 다음날에는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지만, 불법 자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발표 취지에 국민들이 공감하면서 주가는 사흘 만에 다시 안정 수준을 회복했으며, 이듬해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공식 지지율이 80%를 넘나들 만큼 [[문민정부]]는 전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혁 추진의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제' 두 가지 만큼은 이후로도 쭉 김영삼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김영삼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YS는 못말려]]라는, 김영삼을 호의적으로 풍자한 유머모음집이 출간 한 달도 안 되어 30만 부가 팔렸고 YS는 못말려의 아류 유머모음집도 속속 출간되었으며, 10대들 사이에서도 [[최진실]]이나 [[허재]] 같은 당대 유명 연예인과 체육선수를 제치고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선정되었다거나 여대생 사이에서도 가장 만나고 싶은 인물 1위로 선정되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으며 [[14대 대선]] 때는 김영삼에게 평균 4%대의 표밖에 주지 않았던[* 전북 5.7% / 전남 4.2% /광주 2.1%.] [[전라도|호남]]에서도 김영삼에 대한 지지율이 '''20배 가까이''' 치솟음으로써[* 1993년 [[전남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호남권에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 지지율이 70 ~ 80%대를 넘나들었으며, 특히 하나회 숙청과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당시에 열렬히 환호하는 여론이 대세였다.], 지난 22년 동안 우리나라 발전을 좀먹은 영호남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국민 화합을 이룰 최초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사(慶事)가 계속된 건 아니었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보통 1~2번 있는 대형사고가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정권 출범 한 달 후,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필두로 100명 전후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1993년 ~ 1995년 사이에 무려 6건이 발생했으며, 부모를 살해한 사건, 부유층 대상 잔혹 범죄사건(하단 주석의 박한상, 지존파 참조)이 발생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당산철교|서울 당산철교]]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계기로 실행된 전격적 서울 한강교량 안전점검에서 부실공사 실태를 발각당한 것도 김영삼 정부 임기중이었던 1994년이었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도 1994년 발생했으며,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29116_19434.html|경인 축 교통수송시스템의 수용능력 초과 패닉]], [[남총련]]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656_19434.html|서울 영등포역]]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620_19434.html|점거시위사건]], 그리고 부천-인천 세금포탈사건 등 한 해 대형사고들이 연달아 발생함에 따라,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사고의 면면을 보면, 1993년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대구 가스폭발 사고]]처럼 '''안전 문제에 소홀한 무리한 일 추진'''에서 비롯된 사고가 있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처럼 제3공화국 ~ 제5공화국 시절 '''부실하게 건축된 구조물'''들이 무너지게 된 인재(人災)도 있었다. 즉, 급속한 경제 성장의 '''누적된 모순'''이 그 시점에 터지기 시작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런 각종 사고들 + 여러 엽기적인 살인사건[* [[박한상(범죄자)|박한상]], [[지존파]], [[온보현]], [[김형진 이사장 피살사건]] 등]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그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영삼'''이었던 것.[* 무리한 일 추진은 재발 방지 차원에서 강조하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둘 수 있지만, 기존 부실시공된 교량(다리), 백화점 같은 건축물 붕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로, 사전에 예상하고 방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단,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발생한 후 김영삼이 "부실 기업을 물려받은 기분"이라고 심경을 토로한 것은 실언이라 할 수 있다. 본인 입장에서야 확실히 위에 설명한 것처럼 그 전 시대에서 이미 잘못된 채 이어져오다가 터진 일이라 억울한 면이 있긴 하겠지만 이걸 대놓고 말해버리면 안됐던 것. 실제로 문민정부 출범 후 세가 위축되어 있던 보수층 일각에선 산업화, 경제 개발 시기의 업적을 폄하한 것이라 반발하며 반격을 꾀하는 빌미가 되었고, 야권에서는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을 탓할 것인가?"라는(책임 회피라는) 비판을 불러왔기 때문.][* 묘한 우연으로, 1993-1995년은 유독 내외(內外)로 대형사고가 많았던 해였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엽기적인 테러사건이 속출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만 봐도 [[옴진리교]]에 의해 터진 [[카메이도 악취사건]], [[마츠모토 시 사린가스 살포사건|마츠모토 사린사건]],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자신의 여동생을 사이비종교집단에서 탈퇴시켜 데리고 나온 공증관리사무소장 카리야 키요시 씨 살해사건]], 그리고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졌고, 미국에서도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사건|월드 트레이드센터 지하 폭탄테러사건]],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오클라호마 주 소재 연방정부청사 폭탄테러사건]] 등이 터졌다. 그러니까 1993-1995년은 한미일 3국이 공통적으로, 이때까지 고속주파만 해 온 부작용이 줄줄이 터져나온 해였던 것.] 1994년, 우리나라 쌀시장 개방 여부에[*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시절, "쌀시장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연설문으로 [[민자당]]이 농업 인구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관심이 모였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는, 생존 위기에 직면한 농민들이 죽음을 각오한 강경 투쟁 의지를 [[미국]] 협상단에게까지 전달하는 데 성공하며 다른 나라보다 몇 년간 개방 시기가 유예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세계무역기구|교역증대를 위한 국제화의 대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입장만 고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시 YS가 발표한 사과문 내용이다.],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쌀시장 개방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여파로 1995년 들어서는 지지율이 다소 하락하였다.[* 80%까지 상승했던 호남 지역 지지율이 특히 많이 떨어졌는데, 원인을 살펴보면, 호남의 낙후를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응할 만한 개선 의지를 여권이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점과, 그 전년도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대통령이 "처음" 언급하는 자리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평가는 역사에 맡기겠다"는 모호한 수사를 썼던 것이 타격이 되었던 것이다.][* 일례로 [[박태준]] 선생의 제2 제철소 건설 결정으로 경기가 활성화된 광양항의 시설을 확충해 점차 항구 기능을 강화하고, 부산항 수출 - 수입 물동량 일부를 광양항에 유치한다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시설이 낙후되고 물동량이 포화 상태에 이른) 부산항을 보조할 [[부산신항|가덕도 신항만 건설]]에 우선 순위가 밀려 지원이 늦어졌다.] 사실 [[http://www.gallup.co.kr/contactus/noticeContent.asp?seqNo=163|갤럽의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조사]]를 살펴보면 다소 하락이 아니다. 1993년 4분기부터 하락하기 시작해서 1994년 4분기부터 1995년 4분기까지는 30% 위로 올라가지 못했으며, 특히 1995년 2분기, 3분기는 28%, 29%였다. 이때문에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되었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은 대참패를 하고 만다. 그렇지만, 일부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두 [[전두환|전]][[노태우|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으며, 1995년에는 마침내 호남인들의 숙원 중 하나였던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착수하는 등 개혁 추진 의지가 변치 않았고[* 개혁과는 별개로 구(舊)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해 자원 낭비를 줄이고자 했던 것도 문민 정부 시절에 시작된 일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1996년 말까지 기업고정자본형성(고정투자)이 전년 대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일 만큼 기업 투자가 활발했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5.9%[* 97년 수치이다.] ~ 9.6%라는 호조를 보였으며, 동년 말에는 국민총소득([[GNI]])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듬해인 1996년 10월 11일, 경제선진국가단체라 불리는 [[OECD]]에 가입할 만큼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질 수 있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23/0200000000AKR20151123056900002.HTML|김영삼 정부 당시 경제지표]]. 더군다나 노태우 정부를 괴롭혔던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의 상승도 노태우 임기 말부터는 부동산 규제가 먹히고 신도시 분양이 진전 됨에 따라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었고, 김영삼 정부도 금융실명제의 도입과 부동산 거래실명제도의 도입으로 노태우 정부때의 부동산 정책기조를 이어나갔기에 소득이 증가하면 바로 소비와 저축의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 과정을 거쳤기에 내수시장은 활황을 보였다. 이런 문민정부의 모습을 지지하는 여론이 여전했기 때문에, 이대로 임기를 마무리했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김구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고 퇴임이 되고 나서부터는 [[위인전]]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라는 농담반 진담반 같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사실 이건 농담만은 아닌 게 김영삼 초기 때 히트했던 아동 서적인(그리고 표절로 점철되었던) [[게임북]]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에는 김영삼에게 호의적인 내용이 다수였고, 비단 게임북뿐만 아니더라도 김영삼에게 찬사를 보내는 어린이 서적들도 잔뜩 나왔을 정도.][* 이 부분에 대한 반론도 있다. 갤럽 설문 조사결과를 보면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의 군사반란 책임을 물은 후 긍정 평가가 올랐지만(약 41%) 1996년 3분기에는 다시 30%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지지하는 여론이 여전히 높았다고 보는 건 무리가 있으며, 위인전 얘기는 가십거리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 그리고 애초에 노태우를 잡아 가둔 것은 박계동의 폭로 때문이다. 박계동의 폭로 전까지만 해도 야당인 국민회의와 민주당이 주장하던 5.18 특별법 제정을 반대했지만, 김대중이 노태우에게 20억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화살이 1992년 대선자금 문제로 비화하자 이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자, 전격적으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임자 처벌 카드를 꺼낸 것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96년 12월 26일 새벽,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노동관계법 개정안과 불고지죄 및 찬양고무죄 수사조항을 부활시킨 안기부법 개정안이 [[신한국당]][* 노태우와 전두환을 구속하고 YS의 캐치프라이즈인 '신한국 창조'에서 따서 [[민주자유당]]에서 당명을 바꿨다.] 소속 국회의원 155명의 표결만으로 7분 만에 [[날치기]] 통과된 후부터 여론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리해고''' 및 [[안기부]]의 수사권 강화와 관련하여 대다수가 노동자였던 국민들과 민주계 인사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고, 97년초 부도가 난 [[한보그룹]]의 후속 조치과정에서 [[1997년 외환 위기#s-3.2|한보사태]]가 터지면서 관련 법정 증인인 박석태 전 [[SC제일은행|제일은행]] 상무가 97년 4월 목을 매 자살하고, 동년 5월에는 차남 [[김현철(1959)|김현철]]이 뇌물 의혹[* 다만 김현철 본인은 여론에 떠밀려 강제구속되었다고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실제 그의 죄목은 뇌물이 아니라 대선자금 조세포탈죄였다. 즉, 아버지 대선 돕고자 대선자금 지원해준 쪽을 이후에 소통령 행세하며 도와주려다 스텝이 꼬인 것.]으로 구속되는 악재까지 겹치게 되었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93-00_01040507.jpg]] 9월 30일,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9501_13449.html|신한국당, 이회창 신임 총재로 선출 당시]] 악재가 겹치는 와중에도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차기 [[신한국당]] 대선 후보는 언제 어떻게 선출하나?"는 기자의 질문에 "적절한 때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 총재의 입장에서 분명한 내 생각을 당원과 국민에게 전달하겠다."[* 당내 대선 구도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말.]고 답하고, 당시 호평을 받고 있는 [[이수성(정치인)|이수성]] 국무총리[* 학식과(서울 법대 교수 출신이다) 정치적 안목을 모두 갖췄다는 평을 받은 정치인. 1996년 10월, [[DJP연합]]의 물밑작업이 한창이던 시기에, 언론에 “책임정치 실현과 지역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제가 좋은 탈출구가 될 수 있다”며 '''내각제 개헌 가능성'''을 시사했으며, 당사자인 [[김종필|JP]]와의 골프 회동을 주관해, 막판까지 DJ와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기도 하였다. 15대 대선에서 당선된 김대중 후보와 2위 이회장 후보 간 표차가 시군(市郡) 1곳 차이인 39만 표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수성 총리의 제안이 채택됐다면, 대권 향방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를 당으로 보내지 않고 행정부 안에 붙들어 둠으로써, 여권의 잠재적인 대권 주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마로 삼으며[*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이 97년 당시 여권의 대선 구도를 보면서 분석했던 내용들이다. ※ 출처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장성민]], [[김종혁]] 공저)》], 노련한 정치 9단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레임덕]] 현상을 최소화하고 대선 전까지 흔들림 없는 정책 추진을 기대할 수 있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1996년 4분기부터 28%, 14%, 심지어는 '''7%'''를 찍어내며 하염없이 추락하고만 있었고, [[http://hankookilbo.com/v/09cd6275e94f401dbcf9e4ef6307a989|김현철 사건 이후로는 식물 대통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한 확장 후유증을 앓던 대기업들이 '''매월''' 잇달아 도산하고, 원화 가치가 달러당 1,900원으로 폭락하는 가운데 식물 정권 상태이다 보니 별다른 대책을 내지도, 대책의 약발도 보지 못한 채, 결국 달러 부족으로 11월 21일 결국 [[1997년 외환 위기|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임기 말 긍정 평가가 6%까지 추락하게 된다.[* 이 드라마틱한 지지율 변화 때문에 김영삼의 지지율은 해외에서 연구대상이다. 민주국가에서 도무지 불가능해보이는 8~90%에 가까운 지지율을 달성한 대통령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몰락할 수 있냐는 것.] 이 7%라는 지지율은 먼 훗날 [[최순실 게이트|어떤 역대급 정치 스캔들]]을 터뜨리는 [[박근혜|대통령]]이 나오기 전까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지지율이었다.[* [[박근혜]]의 탄핵 직전 지지율은 4%였다.] 1997년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를 한 달 여 앞둔 뉴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32-00_01014127.jpg]] [[1997년]] [[11월 8일]], 당시 임기 말의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 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797_19482.html|김영삼 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하지만 직후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의 혼란 수습 노력은 빛이 바래게 되었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73-00_01012006.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73-00_01032211.jpg]]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의 [[이인제]] 세 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A0%9C15%EB%8C%80_%EB%8C%80%ED%86%B5%EB%A0%B9_%EC%84%A0%EA%B1%B0#cite_ref-12|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 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되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221_19482.html|전두환 노태우 사면 결정 정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