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신 (문단 편집) == 사망 == [[1986년]] [[8월 15일]] [[경기도]] [[고양시|고양군]] 송포면[* 현 [[고양시]] [[일산서구]] [[송포동(고양)|송포동]]] 법곶3리 앞의 [[한강]] 하류에서 익사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부근 경계 초소의 초병이 발견하였다. 경찰 수사 결과 익사체의 신원은 김영신으로 판명되었고 성적 부진을 비관하여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OB 베어스]] 측은 김영신의 영결식을 치르고 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김영신의 등번호 54번을 [[KBO 영구 결번]] 처리하였는데,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KBO 영구 결번]] 사례다. 최고의 유망주였으나, 주전 경쟁에 밀리며 자신의 성적과 신세를 비관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선수.[* 비슷한 결번 사례로, 2010년 2월 5일 미야코지마 스프링캠프 숙소에서 추락사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오제 히로유키(향년 25세)의 41번 역시 오제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2019년까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김영신과 달리 오제는 입단 후 바로 1군 자리를 꿰차며 주전으로 자리잡아가던 중이었고,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일 가능성은 낮다.] [[파일:김영신_기사.jpg]] 김영신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 만약 당시에 [[트레이드]]가 활성화됐다면 OB가 아닌 다른 팀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텐데[*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포수 자원은 정말 구하기 어려워서 포수 영입에 있어서 각 구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선수층이 지극히 얇았던 1980년대 중반이었기에 포수 영입의 필요성은 더 강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프로야구 출범 초창기로 2군 리그마저 없을 정도로 리그 저변이 취약했고,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팀에서 입지가 좁아져 쫒겨난다'는 부정적이었던 시절이기에 트레이드의 'ㅌ'자도 꺼내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당시에는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시절이었고[* 당시 트레이드는 구단이 선수에게 보복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고 선수 입장에서는 내 고향, 내 직장에서 버림 받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트레이드 대상이 되면 이는 팀에 쓸모없는 존재, 다시 말해 '퇴물이라서 정리한다.'와 비슷한 의미였다. 그 예로서 유명한 [[최동원]]-[[김시진]], [[김용철(야구)|김용철]]-[[장효조]] 트레이드. 그리고 1980년대에는 내 고향 선수를 다른 팀으로 보내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이 인식이 사라진 것은 김영신이 세상을 떠나고 한참 뒤인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였다.] 선수가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청하거나 선수의 진로를 열어주기 위한 트레이드가 이루어진 사례도 매우 드물었다.[* KBO 리그 1호 트레이드 당사자인 [[서정환]]의 경우가 선수가 요청해 트레이드된 대표적인 사례지만 이런 사례가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결국 김영신의 비극적인 죽음은 리그 내 선수 트레이드 활성화로 선수 활로 모색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사건으로 꼽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