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일(1925) (문단 편집) == 생애 == 김영일은 1925년 9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 육성동(현 정주시 오성리)에서 태어났다. [[오산고등학교(서울)|정주 오산중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43년 4월경, 오산중학교 동창생들과 집단으로 탈출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작요원이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01|조병걸]](趙炳傑)을 만나 그의 지도를 받고 [[한국광복군]] 화북지대에 공작대원으로 입대하였고, [[장쑤성]] [[쉬저우시]]에서 합법적 거점을 이용하여 애국청년 포섭공작 활동에 진력하였다. 1944년 6월부터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기간요원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 한편, [[박상기(독립운동가)|박상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31|문수열]](文洙烈), [[한이윤]]과 한국광복군 기관지 『빛』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홍보활동과 동지 모집 및 호송, 연락장교 등으로 활약했다. 1945년 5월에는 [[섬서성]] [[시안시]]에서 한·미 합동군사작전의 일환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미군 [[OSS]] 특수 훈련 무전반에서 훈련을 받던 중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귀국 후 1946년 9월 [[장호강]] 등과 함께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1949년 2월 21일 [[육군사관학교]] 8기(특별4반)으로 입교해 군인의 길을 걸었다. 같은 해 4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한 그는 이듬해인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군 복무 중이던 1966년 국민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군문에서는 1966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기획처장으로 있으면서 대령에서 준장으로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00227#home|진급했으며]], [[제1야전군사령부]] 군수참모, 1969년 주월남(駐越南)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 사령관, 1970년 [[제25보병사단]]장, 육군본부 비서실장, [[제3군수지원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1976년 [[육군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79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https://press.kookmi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1970|#]] 예편 후 [[한국비료]] 상임감사를 지내다가 1980년 [[한국해외개발공사]]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45559#home|사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광복군동지회 회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2008년 6월에는 제18대 광복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2011년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분당제생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https://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148708386|#]] 그의 유해는 2011년 3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