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진(야구) (문단 편집) === 여담 === 사실 위의 모든 사실은 애교로 봐 줄 수 있는데, 바로 [[삼성 라이온즈]]가 1995 드래프트 때 투수 '''[[진필중]]을 대신해서 지명했던 선수가 김영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류거이|진거김]]~~ 그래도 변명거리가 있는 게, 대학 시절만 해도 김영진과 [[진필중]]은 넘사벽이었다. 김영진은 [[동국대학교|동국대]] 시절 4년 동안 줄곧 [[태릉선수촌]] 밥을 먹은 91학번 최고의 포수였지만, [[진필중]]은 [[중앙대학교|중앙대]] 4학년 당시 어깨 부상으로 인해 1승밖에 거두지 못했던 투수였다. 하지만 프로에 들어와서 위상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야만없이지만, 만약 [[진필중]]이 두산에서만큼 모습을 보이며 삼성에서 활약했다면 굳이 [[임창용]]을 '''[[양준혁]]+현금 20억'''을 쓰며 데려올 일도 없었다.[* [[진필중]]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임창용]]과 쌍벽을 다투는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다.] 게다가 진필중은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6차전 승리투수가 되면서, 2승3패로 몰리는 상황에서 숨을 돌림과 동시에 OB가 패권을 가져갔으니, ~~그렇다면 롯데가 우승을 못한 건 [[2020년]] 현재 28년이 아니라 25년이 됐을 수도 있다~~ 프로야구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드래프트였다고 볼 수 있다. [[이문한]] 전 삼성 [[스카우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진필중]]의 잠재력을 믿고서 2차지명 2라운드에서 뽑기로 [[진필중]]의 가족과 약속했는데, OB 측에서 이를 간파하고 2라운드에서 [[진필중]]을 뽑아서 허탈해했었다고 한다. 전성기가 지난 [[2003년]] 이후 [[먹튀]]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진필중]]은 [[임창용]]과 더불어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군림했다. 더군다나 삼성이 두산에게 하극상을 당했던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양 팀 투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철벽으로 막았던 그를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반대로 임창용은 두산의 우승이 결정된 6차전에 등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질러 [[1997년 한국시리즈]] 당시의 씽씽투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경기 패전투수일지라도 임창용을 비난하기는 힘든게 임창용은 직전 경기인 한국시리즈 5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시리즈 내 양팀투수들 중 유일한 선발승을 거두었으며 갈베스, 김진웅 모두 무너졌던 당시의 삼성의 투수진 중 더 믿을만한 투수가 없어서 등판했고 등판 자체가 무리였다.] 그 날 그 해 우승팀 해태는 광주 홈구장에서 현대를 만나서 더블헤더 '''8피홈런''' 맞고 두경기 다 지면서 선두싸움에 먹구름을 안았다. 그 해 현대 타선이 박재홍 이숭용빼면 완전 물인데다가 팀 총 홈런이 82개였다. '''즉 현대는 한해에 칠 홈런 10%를 이날에 친 것.'''[* 2000년 기록적인 개막3연전 19홈런을 쳤어도 그해 총 홈런 10%가 안 되었다.] 그러면서 해태는 엘지에 2게임 차로 쫓기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