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완선 (문단 편집) == 이모와의 관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가족_김완선.jpg|width=100%]]}}} || || {{{#ffffff '''윗 사진에서 맨 오른쪽이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한백희, 아래 사진은 이모가 운영하던 연습실이다.''' }}} || >"'''완선이는 제가 매니저이기 전에 저의 언니의 딸이기 때문에 조카이자 딸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완선이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도 저였고 그래서 굉장히 책임감도 느끼고 완선이가 잘돼야 한다는 염원이 누구보다도 강하고...'''" -1994 인터뷰 중 한백희를 설명하기 이전 김완선의 외가는 유명한 민속춤의 전통 명가로 김완선 외증조부가 바로 한국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 명인이다.[*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태평무, 승무, 학무, 단가무, 검무, 한량무, 살풀이춤 등을 한국식으로 풀어냈으며 한국 무용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생일인 [[6월 12일]]이 한국 무용의 날로 제정될 정도로 한국 무용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과거 [[최승희]]가 한국춤을 배우기 위해 제자로 잠깐 있었을 정도.] 그리고 한성준의 손녀인 [[한영숙(무용가)]]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무의 기·예능보유자였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 살풀이춤을 춰 찬사를 받았다.[* 김완선이 5촌 조카가 되며, 한백희는 사촌 동생이 된다.] 김완선의 막내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한백희 또한 집안의 끼를 이어받아 미8군 클럽에서 팝과 라틴 음악을 하는 가수 생활을 했으며, 가수로 활동한 것 보단 한국 여성 최초로 가수 매니저로 활동, 매니지먼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도 더 유명하다. 김완선의 말로 한백희는 본인의 가수 활동보다 가수를 키우는 일에 더 재미를 느낀 것 같다고. 그에 걸맞게 한백희는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이 뛰어나 당시 자신의 백댄서였던 [[인순이]]의 집까지 찾아가 가수를 권유하였고 결국 인순이를 [[희자매]]로 데뷔시켜 성공으로 이끌어 쇼 비즈니스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김완선을 가두다시피 해서 가수로 만든 한백희는 인순이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대형 무대에 서려면 춤이 중요하다고 했다고하며 당시 생소하게 에너지 넘치는 댄스를 보여주었던 [[김추자]]의 춤과 무대를 보여주고 따라시켰으며 칼춤, 무당춤, 북춤, 장구춤, 살풀이까지 가르쳤다고 한다.] 한백희는 [[스파르타]]식으로 김완선에게 춤과 화성학부터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다루는 작곡 수업을 가르쳤는데[* 이는 김완선이 후에 자신의 곡을 작곡할 때 굉장히 도움이 됐다며 이모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지금의 연습생 개념의 선구라면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데뷔 준비하느라 거의 3년동안 부모 집에도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http://www.vop.co.kr/A00000395731.html|기사]] 당시 이모가 살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서 7년간 고립되어 살았는데 지금도 외진 축이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외진 곳이 도봉구 방학동이었다. 무릎팍 도사 출연 당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한백희는 길거리 댄서, 무용수들에게 연습실을 무료로 내어주는 대신 김완선을 트레이닝 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덕분에 김완선은 그 당시에 스트릿 댄스, 발레, 현대 무용 등 다양한 춤들을 하드하게 트레이닝받으며 일종의 연습생 생활을 했다. 여담이지만 마침 김완선이 데뷔 준비를 하던 시기가 [[이수만]]이 연예기획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라 이는 이수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연습생 시스템의 원조였다.''' 그녀와 한백희의 질긴 인연은 한백희의 작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옷도 그녀가 맞췄고 안무도 그녀가 짜주었고,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도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불타는 청춘]]에서 간간히 언급되기로는 동시기 활동했던 가수들마저 그녀와 대화 한 번 못 해봤을 정도로 한백희가 간섭했다고 한다. 이는 한백희가 담당했던 희자매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는데, 단 하루 한백희가 쉬었던 날 다른 매니저가 접근해서 인순이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을 빼갔고, 이때문에 김완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모양. 윤종신 역시 라디오 스타에 김완선이 출연했을 당시, 신인시절에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는데 항상 이모님이 곁에서 지키고 계셔서 그러질 못했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그리고 김완선에게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으며 2006년에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릎팍도사]]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완선은 데뷔 후 1998년 그녀의 이모와 결별하기까지 13년 동안 가수 활동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 번도 정식으로 받지 못했다.[[https://www.spotv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7930|#]], 당시 이모부의 사업이 잘 안 풀려 그쪽으로 돈이 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한백희가 따로 사치를 하거나 하는 일 없이 옷 2~3벌로 사계절을 버티고 병원비가 아까워서 아파도 병원에 잘 안가고 장신구 같은 건 전혀 사지도 않는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 이에 김완선은 차라리 이모가 자신을 위해서 돈을 사용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라 말했다. 이후 한백희는 건강이 악화된 후에 응급실에 자주 갔는데 당시 비참한 상황에서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김완선밖에 없어서 돈을 빌려달라고 자주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에 김완선은 할 수 없이 돈을 빌려주었지만 워낙 악연이었기에 왜 과거에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주지 않았냐는 말을 했고 한백희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하며 그리고 김완선은 '''그게 자신이 이모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KBS2TV 승승장구 (2011년 4월 26일) 에 나와서 이모 한백희에 대하여 한 얘기다. >"저의 모든 거, 좋은 거, 나쁜 거까지 다.. 저의 부모님이기도 하고 선생님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어떤 무대는 안좋게 끝날 때도 있는데 같이 속상해 하기도 하고, 어떤 일이 잘돼서 성사되면 같이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되풀이되고... 그러다가 보니까 제가 남자를 만날 수가 없었어요" "제발 좀 빨리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길 바랐는데 이제는 많이 없어진 것 같고..." "이모 이제 원망이나 분노는 없으니까 편히 쉬세요.... 미안해 하지 말고" 승승장구에서 MC들의 "왜 남자가 없었나"라는 질문에 당시 이모의 엄청난 과보호 때문에 남자를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다고 말했다. 앞으로 결혼 계획에 대해선 지금 (2011년) 40대 나이에 결혼할 수는 없고 나중에 50~60대가 됐을 때나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팬들 중에서는 자신과 이모를 파국으로 내 몰았던 이모부 때문[* 고 한백희가 김완선의 수익을 가로챈 이유가 바로 상기됐던 남편의 사업빚. 김완선이 벌어오는 돈을 믿고 계속해서 일을 벌리고, 그 사업이 계속 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즘 세대의 관점에서도 아내가 남편의 사업상의 고충을 외면하기 힘들지만 8, 90년대 아니,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내가 철저히 남편을 위주로 평생을 살아야하는게 당위성처럼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한백희 여사 역시 조카인 김완선에 대한 애정이 컸겠으나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는 암묵적 의무로 인해 남편을 위해 본의 아니게 조카 김완선까지 희생시킨 꼴이 되었을 것이다.]이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