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완선 (문단 편집) === 1983~1989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데뷔_김완선.jpg|width=100%]]}}} || || {{{#ffffff '''김완선 데뷔''' }}} || 인순이의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를 통해 [[1983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백댄서로 연예계에 발을 들인 후, [[1986년]] 1집 '[[독집 제1집]]'을 발표하며 단번에 인기 가수로 자리 잡았으며 데뷔 당시의 나이는 겨우 만 17세였다. 이 당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렬한 눈빛이 대중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보여졌는지 데뷔 당시 이 노래 가사 중 '어둠이 무서워요'를 '[[삼백안|니 눈]]이 더 무서워요~'[* [[이주일]]이 이 말을 처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좀더 확실한 것은 확인이 필요하다.]라고 패러디한 것이 더 화제가 되어 유명세를 누리기도 했다. 1집 앨범은 신인 가수에다가 당시에는 드물었던 댄스 음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화제성에 힘입어 3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당시 음반 시장이 활성화되기 이 전임을 감안하면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71000209208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7-10&officeId=00020&pageNo=8&printNo=20236&publishType=00020|#]]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dmzzXtAMqw)]}}}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a5ErNX3ijs)]}}}|| || '''1984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의 김완선''' || '''1986년, 첫 데뷔무대 오늘밤''' || 그녀의 춤과 퍼포먼스, 파격적인 의상과 그 당시 연예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와 표정 연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였기에 '''한국의 [[마돈나]]'''라는 수식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완선 1집은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음악적인 완성도도 괜찮은 편이었으며, 이는 조용필의 백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박광호가 프로듀서를 하고 [[산울림]]의 멤버인 [[김창훈(음악인)|김창훈]]이 전곡의 작사 작곡을 맡았기 때문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87_김완선.jpg|width=100%]]}}} || || {{{#ffffff '''1987년의 김완선''' }}} || 1년 후 낸 2집 ‘[[나홀로 뜰앞에서]]’는 김창훈이 작사 작곡만이 아니라 프로듀서까지 맡아 만들어진 앨범으로 2년차 징크스 없이 <나홀로 뜰앞에서>와 <리듬 속의 그 춤을>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2집은 일단 김창훈이 전곡을 만든 버전이 나온 후 수록곡 중 하나인 <충격>[* 이 노래는 제목처럼 그야말로 '''충격'''적인데, '''[[아이유]]의 3단 고음 못지않은 고음이 등장'''한다.]이 빠지고 김완선의 커리어에 큰 획을 긋게 된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리듬 속의 그 춤을>이 들어간 다른 버전이 다시 발매되는 형태로 나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j3lnUIG3bM)]}}} || || 1987년 쇼특급 '''리듬 속의 그 춤을''' || 신중현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박정희의 요구를 거부한 대가로 방송금지를 당하다가 정권이 바뀌고 겨우 해금이 됐지만 록의 시대는 이미 저물어 음악을 할 수 없어서 록의 대부가 나이트클럽에서도 쫓겨날 정도인 상황이었다. 이 때 한백희와 김완선이 찾아와서 곡을 달라고 부탁해서 신중현은 김완선의 무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뒤 그 느낌을 가지고 <리듬 속의 그 춤을>을 댄스 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Uk_rxeB3yw, start=264)]}}} || || 김완선의 대표 무대로 손 꼽히는 '''1987년 팩스뮤지카''' || 당시 신중현은 컴퓨터를 직접 구입해서 스스로 독학해가며 리듬을 찍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대적인 댄스 뮤직[* 신중현이 댄스 음악을 만들지 않던 것은 아니다. 댄스 가수의 시초격인 [[김추자]]도 신중현의 곡에 춤을 춰 큰 인기를 얻었으며 신중현의 곡 중 춤을 출 수 있는 곡은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현대 기술을 이용해 만든 댄스 음악은 김완선의 곡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리듬 속의 그 춤을>이란 명곡을 만들어 냈고, 김완선은 밤낮으로 무대 경험을 쌓으며 실력을 완성시켰다. <리듬 속의 그 춤을>은 해외 아티스트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김완선의 현란한 댄스무빙과 고유의 카리스마에 제대로 맞물려 대히트로 이어졌다. 큰 사랑을 받은 김완선은 당시 해외 대형 가수들이 함께하던 대형 국제 무대인 팩스뮤지카의 오프닝에서 거의 '''신들린''' 수준의 파격적인 무대를 보여주는 등 대중에게 더욱 더 진화된 본인의 실력을 각인시키며 서서히 활동을 마쳤다. 시간이 흘러서 이 노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수단 입장곡으로 나오며 현재에도 김완선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다. [[1988년]] 3집은 [[이장희(가수)|이장희]]가 프로듀싱한 음반으로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웠고, 이장희의 히트곡인 '그건 너'를 댄스풍으로 리메이크해 수록하였다. 그러나 김완선의 인기는 여전했어도 앨범 자체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김완선의 다른 곡은 나왔어도 3집 타이틀곡은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망하진 않았고 김완선이 후에 예능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언급할때 동년배 패널들은 이 노래를 다 따라 부를 정도였다.[* 2013년 해피투게더 출연분 등] 1~2집에 비해 임팩트가 상대적으로 떨어질 뿐 주요 팬층이었던 젊은 세대들한텐 알려질만큼은 다 알려졌다고 봐야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um71ennX3h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공연_김완선.jpg|width=100%]]}}}|| || '''1987년 일본 ABC TV 출연 당시''' || '''일본 공연 당시 기사''' || 1987년 당시 김완선은 일본 진출을 위해 현지 기획사와 이런 저런 미팅을 위해 자주 출국했고 이 시기 일본 TV에 출연해 '오늘 밤'의 일본어 버전을 아침 방송에서 퍼포먼스한 것이 수년 뒤에 영상으로 발굴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본 아나운서가 쇼크를 먹은 듯한 표정과 김완선의 현란한 춤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김완선을 상당히 견제했고, 일본 기획사 측에서 저지른 악행등에 상처받아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하여 향후 1~2년간 진출을 하는듯, 마는듯하다가 결국에 접어버렸다. 당시 일본 기획사에서는 김완선의 홍보를 위해 촬영한다면서 그녀가 녹음실에서 퍼포먼스하는 영상을 촬영했는데 그 비디오를 토대로 같은 나이였던 다른 여가수가 해외에서 똑같이 뮤직비디오를 찍고 공개하는 등 자국민의 스타들을 위해 김완선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그 당시의 일본 연예계 상황 자체가, 해외 스타를 영입해 CF를 찍은 다음 자국민을 그 해외 스타보다 더 많은 개런티를 주어 홍보하는 등 일명 자국민 띄어주기를 시전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당시 김완선의 일본 진출을 두고 한백희 여사의 철저한 마케팅과 섭외력으로 현지 뉴스에 10분 가량 특별 편성되기도 했고 [[요시모토 흥업]]과 손을 잡아 일본의 음악 방송에도 출연했고 공연까지 마쳤지만 정식으로 음반을 낸 것은 싱글 '람바다'가 전부이며 이 외에 녹음한 여러 곡들은 결국 정식으로 발매되진 않았다. 이후에도 몇번 일본 활동에 관한 계획이 보도되긴 했지만 계획 선에서 마무리 되었고 실제로 공식적인 활동을 하진 않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8IFVOtI45A)]}}} || || 1988년 '''사랑의 골목길''' || 그리고 3집 시절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며 훗날 인터넷 상에서도 큰 화제가 된 무대가 바로 이 사랑의 골목길 라이브 영상이다. 팔과 다리에 막대기를 달고 인형들을 매달아서 춤을 추는 영상인데[* 해당 인형이 사실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괴담이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인형을 잘 보면 무게감이 없는 그냥 가벼운 인형 그 자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상으로 국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실은 김완선의 독창적 퍼포먼스는 아니고 미국 쪽 방송에서 가끔 선보이던 컨셉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이용식]] 등이 코미디 쇼프로에서 선보인 적도 있다. 이 인형은 나중에 [[레인보우(아이돌)|레인보우]]가 [[Rainbow Syndrome Part 2|SUNSHINE]]을 발표할 때 뮤직비디오에서 [[지숙]]이 복장만 바꾼 채 똑같이 따라하게 된다. 훗날 예능 프로에 나와 김완선 본인도 저 춤을 출 당시 [[현타|'''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라는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했으며 심지어는 김완선이 [[히든싱어6]]에 원조가수로 출연했을 때에는 이 퍼포먼스를 그대로 재현한 모창능력자가 나오기까지 했다. [[https://tv.naver.com/v/16258743|히든싱어 6 사랑의 골목길]] 이 무렵 김완선은 그냥 춤만 잘 추는 가수가 아닌 [[가창력]] 있는 가수로 변신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말을 기회가 될 때마다 했는데, 이를 위해 [[전인권]]에게 거액을 주고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일도 있다. 원래는 트레이닝뿐만 아니라 4집 앨범 자체를 전인권과 작업할 계획이었던 건데, 전인권이 보컬 트레이닝 시킨다고 온갖 [[기행]]을 시켰기 때문에 도중에 결별, 결국 보컬 트레이닝'''만''' 받은 상황이 되었다. 당시 전인권은 갓 스무살이던 김완선을 작업의 이유가 아닌 다른 마음을 품고 심야에 끌어오는 등의 기행을 저질렀다고 잡지등에서 보도되었으며 전인권 측은 이 사실을 부인했다고 알려진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잡지2_김완선.jpg|width=100%]]}}} || || {{{#ffffff '''잡지에서의 김완선''' }}} || 이 시기 [[이지연(1970)|이지연]]이 등장하자 그의 청순한 매력으로 남학생들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고 매니저인 한백희는 김완선의 식단 관리에도 열을 올린다.[* 그런데 정작 [[이지연]] 본인은 시간이 흘러서 중년이 되고 난 뒤에 '''"김완선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밥을 주지 않아 김완선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고 그 이후에도 이모와 생활하면서 제대로 된 밥 한끼 먹어본 기억이 없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김완선은 반항심에 불타올라 일주일 내내 음식을 거부했고 결국에 그제서야 이모가 제발 좀 먹으라고 타일렀지만 김완선은 이마저도 거부하다가 결국 스케줄 도중에 쓰러지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89_김완선.jpg|width=100%]]}}} || || {{{#ffffff '''1989년의 김완선''' }}} || [[1989년]] 4집은 1990년대 들어가면서 스타 작곡가가 된 하광훈이 프로듀서를 맡는 한편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이름을 날린 기타 연주자 박청귀가 참여한 앨범으로, <기분 좋은 날>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4집 활동 시기에 김완선은 오디오 가수로 변신한다며 [[손무현]], [[윤상]], [[이승호(음악인)|이승호]], [[변준민]]으로 구성된 실루엣이란 백밴드와 함께 방송 활동은 물론 첫 단독 콘서트까지 했고, 이 때문인지 4집의 경우 유독 다른 앨범들과 비교해 곡들에서 연주가 튀는 편이다. 한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성숙함과 섹시함을 앞세웠던 앞선 앨범들에서의 활동[* 당시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어려서 과도한 화장과 복장 등으로 외견 나이를 일부러 올려잡은 감이 있다. 이게 김완선의 영향으로 좀 사라진 이후에 여고생 가수로 다시 등장했던 [[이지연(1970)|이지연]], [[하수빈]]에 이르러서야 이런 이미지가 약해진다. 초등학생 때 발탁되어서 중학생때 데뷔한 [[보아]]때 약간 돌아온 감이 있다.]에 비해 나이대에 걸맞는 발랄함을 내세우는 변화 또한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8ZixKNDgNs4)]}}} || || 1989년 '''기분 좋은 날''' || 4집 타이틀 곡으로 내놓은 '기분 좋은 날'은 전작의 미지근 했던 반응을 만회하고 통통튀는 안무에서 나오는 귀여운 매력을 보여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인 [[안정환]]도 방송에서 선수 시절 주말마다 외출을 하기 전 "토요일 오후~"라고 콧노래를 불렀다는 여담이 있을 정도로 당시 따라부르기 쉽고 재밌는 가사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앨범에 수록되어 있던 리메이크 곡 '이젠 잊기로 해요'도 잔잔한 사랑을 받아 김완선의 대표곡이 되며 성공적인 4집 활동을 마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