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완선 (문단 편집) === 1996~2006년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bpa6-AwXTsY, start=2609)]}}} || || 1996년 김완선 빅 쇼에서 '''탤런트'''와 '''체인징 파트너'''[* 당시 여성 가수가 보였던 안무에 비해 상당히 과격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안무로 댄스가수로서 김완선의 실력은 아직 건재하다라는 점을 보여준 무대이다.] || 한국으로 컴백과 함께 [[1996년]] 11월에 발표한 7집 타이틀곡 '[[탤런트]]'가 가요톱10에서 최고 5위까지 랭크됐고 수록곡인 체인징 파트너가 전국의 클럽에서 큰 인기를 누려 30만장(비공식) 정도의 판매량을 달성했으며 전보다 매출량은 적지만 은퇴 후에도 스타적인 면에서 건재함을 보여준 앨범이다. 사실 타이틀곡인 '탤런트'에 표절 논란[* 김완선의 "탤런트"와 표절시비를 불러일으킨 "댄스 오브 러브".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1997011002221|관련 기사]]]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내릴 수 밖에 없었고 그 당시 김완선 앨범을 공동 제작했던 한백희의 제자 [[김광수(음반기획자)|김광수]][* 티아라, 조성모 등을 제작한 그 사람 맞다.]가 PD 비리 사건으로 고발되어 MBC 출연이 정지되었고 SBS에서도 출연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나마 SBS에서 방영된 [[이주일]]쇼 등에 나오긴 했다. 당시 [[김광수(음반기획자)|김광수]]는 조성모의 뮤직 비디오 제작을 이유로, 대만에 가 있던 김완선의 차를 그녀의 의견 없이 팔아 치워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 더 소름끼치는 건 이 사실을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다는 것이다. 김완선이 2011년 복귀했을 당시 그에게 찾아가 그때 왜 그랬냐고 말하자, 할말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완선 복귀 당시에도 자신이 제작했던 가수인냥 언플하면서 그녀의 복귀가 기다려진다고 말하는 걸 봐서는 확실히 보통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녀의 7집 컴백을 기념해서 MBC에서 김완선 특집 방송을 방영할 예정으로 보도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해당 사건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취소되었고 방송 금지까지 당하는 바람에 KBS 빅쇼에서 치러졌고 당시 김완선의 특집 방송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MBC에서 출연 금지되었으나 [[문화방송 계열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정상적으로 출연했는데 [[부산MBC]]에서 방송된 특집쇼에 출연한 적 있었다. MBC 계열사는 각각 별개의 방송국이지만 MBC가 주주에 참여하고 MBC란 이름으로 쓰고 있는 케이스기 때문이었다. 그 뒤 후속곡 '운명의 장난'으로 활동 곡을 교체했지만 20위 권에 잠시 머문 정도였으며 앨범 자체도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과 함께한 덕에 이미지 이상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던 이전 앨범들에 비하면 평이한 수준이었다. '김완선의 제작자 데뷔'로 홍보했던[* 실제로는 전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댄스 그룹인 '[[오룡비무방]]'[* 그룹 이름은 5마리의 용이 날아다니고 춤추는 동네라는 뜻이라고 한다.(五龍飛舞坊)] 이 참담하게 망하고 1998년, 가수로서 자신이 활동한 데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번도 정식으로 주지 않은 이모와 결국에 결별했고 이후 4년 정도 TV에서 김완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2000년에 1980년대 가수들이 합동 앨범을 내고 홍보할 때 잠깐 모습을 비춘 것이 전부.] 이 때 한백희는 이미 김완선의 이름으로 온갖 빚을 져놓고 있었고, 그녀는 이를 갚기 위해 밤무대 출연과 온갖 행사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야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B7Lpjy0EJI, start=68)]}}} || || 2002년 '''S''' || [[2002년]] 하반기에 당시 대형 기획사였던 팬 엔터테인먼트[* 이 회사는 99년 HS 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이정현(멀티 엔터테이너)|이정현]], [[싸이]], [[채정안]]등 개성있는 댄스 가수들을 데뷔시킨 소속사였다. [[예당엔터테인먼트]]와는 협력사 관계로, 자사 레이블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아주 밀접한 관계인 회사는 맞다. 현재는 예당과 완전히 분리된 회사로서 가수 제작은 오래전에 접었고 드라마 제작을 위주로 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당시 김완선이 팬으로 이적하며 받은 계약금은 5천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높은 금액이긴 하나, 김완선의 인지도와 행사 페이등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 규모를 생각하면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닌것이 의외다. 실제로 2002년 'S' 앨범을 내놓고 김완선이 벌어들인 수익만 해도 4억원이었다고 한다.]로 이적해 내놓은 정규 8집 앨범 'S'[* 뜻은 섹시(Sexy)하고 도발적(Suggestive)인 색채를 가미해, 특별(Special)한 의미를 담았다는 의미라고 한다.], 'Shall We Dance'[* 후속곡이었던 'Shall We Dance'의 가사가 방송마다 다르게 표기 되기도 했다. 앨범 가사지나, 엠넷의 음악방송에선 'Love Love 지금 그 사랑안에 Free Free 마치 나 꿈결처럼 Heart Heart 너를 느끼고 있잖아'인데 지상파 음악방송이나 이를 토대로 받아쓴 음원사이트 등지에선 'Love Love를 Ya Ya, Heart Heart를 Huh Huh로 표기했고 노래방에서는 Heart Heart를 High High로 표기했다. 가사의 문맥 등을 봤을땐 Love Love, Heart Heart가 맞아 앨범 가사지와 딱 맞게 적용했던 케이블 채널 엠넷/KMTV가 맞고 그 외의 가사들은 받아적는 것에 대한 표기 오류로 보인다. 당시 음악방송을 보면 엉뚱한 가사 자막이 많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와 리메이크 음반은 비교적 생소한 트랜스 [[테크노]] 장르였다.[* 이 리메이크 앨범 기획은 원래 96년 7집때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며 당시에도 9곡의 기존 히트곡을 새롭게 편곡해 7집 앨범에 싣을 예정(신곡 7곡+리메이크 9곡이 될 예정이었다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090400329134001&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6-09-04&officeId=00032&pageNo=34&printNo=15872&publishType=00010|#]])이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무산되었고 5년뒤인 8집 앨범에 계승되었다. 1996년 7집 준비때 당초 수록하려던 리메이크 음원들을 2002년에 다시 꺼낸것인지는 불명.] 스타일리스트는 이미 [[태사자]]의 정장 코디로 유명세를 떨쳤던 [[김우리]]였는데 이 때의 실력이 또 한번 방송가에 입소문이 나면서 인정받게 됐다고 한다. 드라마 제작으로도 유명했던 소속사라 8집의 수록곡 중 몇 곡은 발매전 지상파 드라마 OST로 선공개 되어 사용되기도 했고 해당 소속사에서 캐시카우로 제작해 주력으로 키우던 [[싸이]]의 정규 3집 수록곡 '안돼요'에 피쳐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음반이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10위권[* MBC 최종 8위, SBS 10위. KBS는 순위제 미실시.] 안에 안착하고 음반 판매량도 4만장 정도 팔리면서 생각보다 이름값을 해냈지만, 빚문제는 여전한 상황이었으며, 결국 2003년 [[누드]] 사진집까지 찍었지만 누드 사진집을 찍고도 애초에 계약한 만큼의 돈을 받지도 못했고 사진집 문제로 트러블이 생긴 소속사와의 소송으로 고생만 했다. 당시 소속사는 다음 앨범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김완선은 이것이 계약 파기 사유가 된다라는 이유로 소속사와는 별도로 누드 사진집 제의에 동의를 했다. 당시는 여배우들의 누드사진집이 폭주하던 시대였고, 김완선은 빚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계약금 5억원에 러닝 개런티 포함. 이에 소속사가 반발하여 주택은 물론이고 김완선의 저축통장까지 압류했고, 누드 사진집을 낸 곳은 이런 사정을 이용해서 누드사진집의 판매가 부진하다는 이유로 계약금 5억 중에서 2억 밖에 못 준다고 '배째라'가 되었다. 김완선은 밤무대를 뛰면서 2개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소속사와는 계약 해지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사진집 기획사에게는 승소했다. 김완선 개인적 입장에서 이 8집 앨범은 애증의 앨범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나와 나름의 성공을 한 앨범이지만, 김완선 이때 소속사의 소송전은 본인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으며 이 시기의 일들을 생각하기도, 언급하기도 싫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기에 대형 기획사에서 나온 고퀄리티의 이 앨범은 안타깝게도 팬들에게만 회자 되고있는 비운의 앨범이다. 비슷한 연유로 위에 서술된 김광수 대표가 제작했던 7집 앨범 역시 금전적 문제나 표절 시비, 방송국과의 불화로 인한 매니지먼트 미흡 등으로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에 가수 본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2005년]] 말에 9집 앨범 'Return'을 발표했으며 자전적인 노래라 할 수 있는 발라드 'Seventeen'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우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가했지만, 일반 대중들이 김완선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너무 간격이 큰 음악이었고, 왜 갑자기 그런 내용의 가사를 노래하는지도 골수팬들 이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아[* 결별 이후 몇몇 인터뷰를 통해 이모와 헤어진 이유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한백희가 살아있는 상태라 92년 은퇴의 실상 등 차마 완전히 털어놓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진지한 의도가 아쉽게도 잘 전달되지 못한 듯하다. [[2006년]] 이모 한백희의 사망 후 [[하와이]]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현지 대학에서 디지털아트를 전공했다. [[2007년]]에 여성중앙이 하와이로 가서 취재했을 때는 새 앨범 준비 중에 사기를 당했으며 음악활동의 의지를 접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왔으며, 미술 쪽 진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근황만이 간간이 보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