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1924) (문단 편집) == 여담 == * 홍콩에선 작곡가 황점(黃霑), 소설가 예광(倪匡)[* 앞서 천룡팔부를 대필했던 그 작가로 무협 소설(육지금마 등)도 있지만 그 쪽보단 사이언스 픽션 쪽을 주로 집필했고 이쪽으로 더 유명하다. 원진협(原振俠), 위슬리(衛斯理) 시리즈가 대표작.], 미식 평론가 채란(蔡瀾)[* 그가 출연한 몇몇 음식 프로그램의 제목을 김용이 손수 친필로 적어서 로고로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채란 쪽 말고 김용이 직접 타이틀을 친필로 작성해준건 ATV의 해외 [[화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尋找他鄉的故事 정도.]과 함께 홍콩 4대 재자(香港四大才子)로 불린다. 이 중 황점이 2004년에 별세했고, 예광과 김용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현재는 채란만 생존 중. * 그의 필명 첫글자인 [[金]]을 '김'과 '금' 어느 것으로 읽어야 하는지 명확한 결론은 없다.[* 물론 신해혁명 이후의 현대 인물은 [[중국어]] '진(jīn)'으로 읽는 것이 원칙이지만 '김용'의 예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김성탄[[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4%B1%ED%83%84|#]], [[김일제]][[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C%EC%A0%9C|#]], [[김의]], [[김선]] [[김성탄]] 등의 예처럼 '김'으로 읽는 것이 현재는 더 보편적 관행이나, '금'으로 읽어야 옳다는 주장도 있다. * '한 번 쓴 인물이나 줄거리, 감정, 나아가 세부적인 내용조차 중복해서 쓰지 말자'라는 것이 집필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용의 소설은 자기 복제라고 할 만한 부분이 별로 없으며 각각의 작품의 시대, 주제, 캐릭터 등이 모두 다르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녹정기]]는 그때까지 써왔던 김용 소설과 전혀 딴판으로 달라서 연재중에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 아니냐'라는 독자들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게다가 1960-70년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서브컬처에 나오는 여캐릭터 군상들이 다 나온다. [[아자(천룡팔부)|순정파 안데레]]나 [[건녕공주|SM 변태 여성]]부터, 소위 '[[합법로리]]'로 불리는 [[천산동모|나이는 성인인데 몸은 여아인 캐릭터]]까지 이미 김용의 작품에서 등장했다. * 김용의 작품에서 사촌오빠 캐릭터는 무조건 초반에 히로인과 연인관계였다가 이래저래 찌질거리면서 히로인을 매정하게 내치는 악역으로 나온다(천룡팔부의 모용복, 연성결의 왕소풍 등). 그 이유는 김용의 사촌형[* 서지마(徐志摩(쉬즈모), 1897~1931)라고 하는 당대의 유명 낭만주의 시인이었으나 35세의 젊은 나이에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다 사고로 추락사했다. 그의 필명이 운중학이었는데, [[천룡팔부]]에서 운중학이라는 색마 악역이 등장한다.]이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서 가족 내에서의 평판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녹정기]] 서두에 등장하는 명·청 교체기의 문인 사계좌(査繼佐, 자는 伊璜)가 그의 선조라고 한다. * 영화감독 [[장철(1923)|장철]][* 장철과 김용은 비슷한 또래(장철은 1923년생, 김용은 1924년생)에 대학동창이었기 때문에 절친했다. 또 [[천룡팔부]]의 일부분을 대필할 정도로 김용과 절친했던 작가 예광은 장철과 [[시나리오]] 작업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이런 인연 때문에 세 사람이 매우 친했고, 장철은 말년에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 [[벽혈검]], [[비호외전]], [[협객행]]을 영화화 하였다. 김용과 장철은 대학동창이라는 점 외에도 김용이 한 때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도 연출하기도 하는 등 영화에 손을 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친했을지도 모른다.]의 회고에 의하면 [[도박]]을 즐겼다고 한다. [[바둑]]도 좋아해서 1단 정도 수준이었다고.[[http://books.chosun.com/m/article.html?contid=2004012755425|#]] * 2004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자신의 최고 걸작’을 꼽아달라고 하자 “모두 내 자식이라 경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다른 인터뷰에선 '후기로 갈수록, 장편일수록 명작'이라고 말한 적도 있긴 하다.] 또 중국의 역대 왕조 중 [[당나라|당]]·[[북송|송]] 시대, 특히 송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송대엔 문인들이 예의 바르고 서로 존경하고 인간미가 있었고, 당은 강성하고 무협이 발전한 시기였다.”라고 평했다. * 생전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도 즐겨봤다고 한다. '[[대장금]]', '[[겨울연가]]', '[[엽기적인 그녀]]', '[[조폭 마누라]]',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다고 말했다.[[https://news.v.daum.net/v/20071106145708602|#]] * 언젠가 [[오(삼국시대)|오나라]]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를 써보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포기했다고 한다. 삼국지의 진정한 영웅은 [[손권]]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한 바 있다고 한다. * 그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15부작 전부가 여러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되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저자 김용으로 출판한 위작도 많이 있었다. [[고려원]]은 1986년 김용의 작품 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로 이어지는 사조삼부곡을 [[영웅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는데 당시 무려 800만부가 팔렸다. 고려원이 도산해서 사라진 후 사조삼부곡은 [[김영사]]에서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출간했다. 사조영웅전이 2003년, 신조협려가 2005년, 의천도룡기가 2007년 각각 출간되었다. 참고로 예전에는 고려원본을 비롯해 대부분이 정식 라이선스 없이 무단으로 번역 출판되었지만 한국이 [[베른 협약]]에 가입한 것이 1996년, [[홍콩]]이 베른협약에 가입한 것은 1997년이므로 이 이전에는 홍콩의 저작물은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없었다.[* 국가간 저작권 보호는 호혜주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너네가 우리 걸 보호하지 않는데 우리가 너네 걸 보호할 이유가 없다"는 것. 이 때문에 양자/다자간 조약으로 해결한다. 한국이 1957년 일본법을 베껴 처음 [[저작권법]]을 제정했다. 여기에 외국인의 저작물도 보호한다는 규정이 있기는 하나 그냥 립서비스다. 1996년에는 [[베른 협약]]에 가입하였고 저작권법 개정으로 소급효도 인정되게 된다. [[홍콩]]은 1997년에서야 UCC와 베른 협약에 가입했다. 이 때를 홍콩과 한국이 서로 저작권을 지켜줄 의무가 생긴 시점으로 봐야한다.] 조약 가입한 후로는 소급효가 적용되므로 당연히 정식 라이선스가 필요하다.[* 다만 새로 번역 출간할 때에는 정식 라이선스가 필요하지만, 베른 협약 적용 이전에 국내 출판된 서적은 계속 인쇄해서 판매할 수 있다. 또한 베른 협약 적용 이후에 새로운 번역자가 내용을 추가하는 등 개정판을 내더라도 기존의 주요한 창작적 표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면 베른 협약 이전에 출판된 것과 동일한 저작물로 보아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다(대망 사건). 따라서 김영사 이외 다른 출판사의 판본들도 '정식 라이선스는 없지만 저작권법 위반은 아닌' 상태로서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 [[북한]]에서도 그의 소설을 읽는다고 한다. 김용의 말에 의하면 기존에 출간된 불법 판본들은 현재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 사람들이 읽고 있으며 북한군인도 즐겨 읽고 있다고. 이 이야기는 잘 아는 북한 관료를 통해 들었다고 한다.[[https://news.v.daum.net/v/20071106145708602|#]] * [[덩샤오핑]]이 김용의 열렬한 팬이였다.[[https://mnews.joins.com/article/23083224#home|기사]] 문화비평가 올리버 차우의 증언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비밀요원을 홍콩에 보내 김용의 소설을 구해 오게 했을 정도라고. 1981년 김용을 직접 만난 덩샤오핑은 “우린 이미 오랜 친구와 같다. 당신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화대혁명]]기에 금서로 지정됐던 김용의 작품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1981년에야 중국 대륙에서 해금됐다. * 김용은 당대 홍콩의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화대혁명]]에 비판적이었다. 김용은 자신이 1966년 창간한 일간지 명보에 '''“문혁은 중국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한다”'''는 사설을 실었고, 그 외 문혁 당시 [[마오쩌둥]]의 추종자로 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모택동의 부인 [[장칭]]을 비롯해 마오쩌둥의 동료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 ‘[[4인방]]’을 강력 비판하는 글을 써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67년 홍콩에서 중국 공산당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반(反)영국 폭동이 벌어졌을 당시 중공 추종 세력에 의해 암살 대상자 명단에 오른 적도 있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과 그의 오른팔이였던 [[저우언라이]]는 김용의 소설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 사실 김용의 수난은 [[중화민국]]에서도 있었는데, 당시 대만에 있던 국민당은 사조영웅전의 사조가 과거 [[마오쩌둥]]이 쓴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여겨서 김용 소설들을 수십년간 [[금서]]로 처분했고, 대만에서 유통되던 사조영웅전 해적판조차 사조영웅전으론 못나오고 대막영웅전으로 고쳐서 나와야 했다. 동사서독의 동사는 대만을 뜻하는 것이라는 혐의도 받았다. 상기되어있듯 젊은 시절엔 꽤나 급진파로 [[장제스]]와도 거리가 있었고, 중공 정부에서 일하다 또 노선이 맞지 않아 결국엔 홍콩에 정착했던걸 상기해보면 이래저래 이념 분쟁의 피해자 중 한명. * [[알리바바 그룹]] 창업주 [[마윈]]도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김용이라고 한다. 실제로 마윈 회장은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김용과 그의 무협소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마윈은 앞서 지난 2016년 2월 24일 김용의 92세 생일을 축하하는 동영상을 직접 제작해 타오바오 크라우드펀딩(淘宝众筹)에 올리기도 했다. 축하 영상에서 마윈은 “김용의 무협 정신은 나와 알리바바 기업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줬다”며 “창업 초창기, 알리바바 창시자 18명 중 16~7명 모두가 김용의 무협소설을 매우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용의 소설은 상상력과 낭만주의, 의협심이 풍부하다”며 “특히 정의를 실현하는 의협 정신은 나와 알리바바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마윈 회장의 김용 무협소설을 향한 애정은 알리바바 사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마윈의 사무실은 무협소설 색채가 가득한 ‘도화도(桃花岛)’로, 회의실은 ‘광명정(光明顶)’으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회의실 내부에는 김용이 친필로 직접 쓴 문구 ‘못에 가서 물고기를 탐내는 것보다 물러나서 그물을 뜨는 편이 더 낫다(临渊羡鱼,不如退而结网)’가 걸려 있다. 이 밖에도 알리바바 직원들은 모두 무협 또는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닉네임을 갖고 있다. 마윈 회장은 김용 무협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 속 고독한 검객 ‘펑칭양(风清扬/[[풍청양]])’을 자신의 닉네임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평소 마윈 회장은 김용 무협소설 속에 등장하는 문장을 자주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앞서 마윈은 지난 2014년 김용을 직접 만났던 추억을 회상하며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윈은 김용이 사망하자 성명서를 보내며 "김용의 죽음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의 큰 손실"이라며 "특히 그의 작품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여겨온 알리바바에는 더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고 애도를 표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용, version=154)] [[분류:김용(192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