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1924) (문단 편집) == 생애 == 김용은 1924년 2월 6일, 중국 [[저장성]] [[하이닝]]현 위안화진에서 태어났다. 김용의 가문인 하이닝현의 사(査)씨 가문은 명문거족이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 문신으로 ‘경업당집(敬業堂集)’을 남긴 사신행(査愼行)이 그의 직계 조상이며, [[옹정제]] 때 유명한 문인으로 [[문자의 옥]]으로 처형된 사사정(查嗣庭)은 그의 직계 조상인 사승(查昇)의 당형(堂兄)이다. 가문은 [[명청교체기]] 22명의 [[진사]]를 배출했다. 강희제가 사씨 집안을 두고 “문중에 진사가 열 명, 숙질 중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다섯 명”이라 감탄할 정도였다. 김용 당대에도 가문의 명성은 이어졌다. 사촌형 자량자오(査良釗, 사양쇠)가 국립쿤밍사범학원(國立昆明師範學院) 원장, 국립대만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또 다른 사촌형 자량젠(査良鑑, 사양감)은 법률가로 대만 행정원 법무부장과 최고법원장을 지냈다. ‘낙엽(落葉)’ ‘우연(偶然)’ 등을 쓴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 쉬즈모(徐志摩, 서지마)도 친척이다. 김용의 친형 자량정(査良錚, 사양쟁) 또한 ‘무단(穆旦·목단)’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저명 시인이다. 이처럼 학자 가문에서 태어난 김용은 유년 시절부터 높은 수준의 학문을 익히며 보냈다. ‘[[사서삼경]]’, ‘[[제자백가]]’ 등 [[유교]] 경전에 더해 [[불교]]·[[도교]] 경전까지 섭렵했다. 특히 불경에 대해서는 스스로 높이 평가할 정도로 이해가 깊었다. 그외 시와 서화, 한의학, 바둑과 서예에도 상당한 조예를 쌓았다. 이때 익힌 동양고전이 훗날 작가로 성장하는 토양이 됐다. 김용은 1938년 저장성립연합고중 중학부에 입학했고, 이듬해 동기생들과 ‘급투고초중자(給投考初中者·중학생 입시를 위한 참고서)’를 출판했다. 당시 중학생 참고서로서는 최초였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3년 후인 1941년 김용은 퇴학을 당하고 만다. 학교 훈도(訓導)주임의 투항주의를 풍자한 글 ‘아려사만유기(阿麗絲漫遊記)’를 벽보로 게재한 게 문제가 됐다. 그의 재능을 아낀 학교장의 권유로 저장성 취저우중학(衢州中學)으로 전학한 김용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중국 국민당]]이 당(黨)·정(政)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한 중국국민당중앙정치학교(中國國民黨中央政治學校·현 대만 [[국립정치대학]]의 전신)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김용은 급진 [[개혁주의]]자로, 국민당의 학생 통제 행위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당시 중앙정치학교 교장을 겸임한 [[장제스]] 총통과도 거리를 두게 된다. 자유인이 된 김용은 중앙도서관 임시 사서로 일하며 각종 책을 두루 탐독했고,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항저우]] 동남일보(東南日報)에서 외신 번역 일을 맡았다. 1946년 김용은 [[개신교]]계 명문대 쑤저우대학(蘇州大學·현 대만 동오대) 법학원에 편입해 [[국제법]]을 전공하고 1948년 졸업했다. 쑤저우대학 시절 상하이(上海) 대공보(大公報)에 입사, 국제부 외신 번역기자로 일하다 졸업 후 홍콩지사에 발령받았다. 1950년 김용은 청운의 꿈(입신출세)을 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으로 갔다. 출중한 영어 실력을 살려 정무원(현 [[국무원(중국)|국무원]]) 외교부에서 일했으나, [[중국 공산당]] 이념과 대외정책은 그와 맞지 않았다. [[외교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다시 홍콩 대공보로 돌아갔고, 1952년 신만보(新晩報)로 자리를 옮겨 부편집장을 맡았다. 이 시기 김용의 아버지는 중국 [[공산화]] 이후인 1951년 반동지주로 몰려 총살당했다. 김용의 팬으로 알려진 [[덩샤오핑]]은 훗날 그에게 아버지 처형 문제를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덩샤오핑도 문혁 때 중국 공산당에 의해 큰아들이 장애를 얻고 트랙터 공장에서 일하다 손에 상처를 입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신만보 시절 김용은 평생 지기 천원퉁(陳文統)을 만난다. 김용과 동갑인 그의 필명은 ‘[[양우생]](梁羽生·량위성)’으로 1952년 첫 무협 작품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를 발표하기도 했고 김용과 마찬가지로 명문학자 가문의 자제였다. 이 두 사람의 재능을 알아본 신만보 편집장 뤄푸(羅浮)는 신문에 [[무협소설]]을 연재할 것을 제안했다. 이 때부터 김용은 본명 자량융(査良鏞)의 마지막 자를 파자(破字)해 ‘김용(金庸·진융)’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용의 첫 작품은 [[1955년]]작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으로 ‘청 [[건륭제]]가 실은 [[옹정제]]의 친아들이 아니며, 건륭제에게는 [[만주족]]이 아닌 하이닝 출신 [[한족]]의 피가 흐른다’는 야사를 모티프로 했다. 건륭제 후궁 중 [[위구르족]] 공주로서 ‘몸에서 향기가 난다’고 해 향비(香妃)라 불린 함향공주(含香公主)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한족과 이민족의 갈등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독자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56년 김용은 두 번째 소설 ‘[[벽혈검]](碧血劍)’을 홍콩상보(香港商報)에 연재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명 멸망의 원인이 된 ‘[[이자성의 난]]’을 배경으로 명나라 마지막 천자 [[숭정제]]에게 살해당한 명장 [[원숭환]]의 아들 원승지(袁承志)가 무림에서 무공을 갈고닦아 아버지의 복수를 꾀한다는 줄거리다. 이 작품 또한 대성공을 거뒀다. 이를 발판으로 김용은 1957년 새로운 작품을 또 내놨다. [[북송]]이 [[여진족]] [[금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패한 뒤 [[남송]] 건국,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과 송 멸망 등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한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이다. 실제 역사·지리·인물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무협소설의 지평을 대하역사소설로까지 넓혔다는 평가를 받으며 또 한 번 큰 인기를 모았다. 이후 영화, TV드라마, 컴퓨터게임으로 각색되고, 중국과 구미 각국에서 대학 교재로 사용되기도 한 수작이다. 작가로서 명성을 공고히 하던 김용은 자기 작품을 대중에게 더 널리 알릴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개인 매체를 창간한 것이다. 1959년 그는 홍콩에서 [[명보]](明報)를 창간, 발행인·사장·주필을 겸했다. 이때부터 낮에는 신문사 경영자 겸 편집자로, 밤에는 무협소설 작가로서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매체 발간을 맡은 김용은 1959년 신작 ‘[[신조협려]](神雕俠侶)’를 명보에 독점 연재했다. 전작 ‘사조영웅전’ 속편으로 시대 배경은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의 남송 침공기다. ‘사조영웅전’에서 사망한 양강의 아들 양과가 아버지 죽음을 둘러싼 은원(恩怨)을 알아가고,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어 스승 소용녀와 사랑을 이루고자 투쟁한다. 장르적으로는 로맨스물로, 작품 구성의 치밀성과 등장인물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여성 스승과 남성 제자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소재로 여겨졌다. ‘신조협려’는 훗날 독자에게 “최고 무협소설은 아니더라도 최고 연애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용은 ‘신조협려’ 인기에 힘입어 1959년 ‘[[설산비호]](雪山飛狐)’도 선보였다. 만 하루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등장인물의 회상과 내레이션을 통해 수개월, 수년, 수십 년 전 사건이 ‘이야기’로 재현되는 액자소설이다. 한 화자 이야기를 다른 인물이 반박하고, 다른 인물이 또다시 반박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모든 인물 이야기를 종합해야만 전체 줄거리를 알 수 있다는 점, 작품 결말을 독자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취했다는 점 등 때문에 김용 무협소설 중 독특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듬해인 1960년 김용은 ‘설산비호’ 속편 ‘[[비호외전]](飛狐外傳)’ 연재를 시작했다. 전작 주인공 호비(胡斐)의 10대 시절을 다룬 작품이다. ‘사조영웅전’부터 ‘설산비호’ ‘비호외전’까지 연달아 성공하면서 신생 매체 명보는 치열한 홍콩 언론계에서 금세 입지를 다졌다. 1961년 김용은 다시 명보에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연재를 시작했다. 훗날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와 더불어 ‘사조삼부곡(射三部曲)’으로 불리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원나라]] 말 명나라 초, 원 마지막 황제 [[혜종(원)|혜종]] 토곤테무르 재위기다. 송 멸망 후 한족이 원나라에 맞서고자 제작한 신비의 병기 ‘의천검’과 ‘도룡도’를 둘러싸고 무림 고수들이 벌이는 암투, 강호 세계의 은원, 한족과 [[몽골족]]의 갈등 등을 다뤘다. 이 여세를 몰아 김용은 1961년 장편(掌篇) ‘[[원앙도]](鴛鴦刀)’, 단편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등도 연달아 썼다. 원앙도는 원도(鴛刀)와 앙도(鴦刀)라는 길고 짧은 칼 한 쌍을 차지하면 천하무적 무공을 지니게 된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백마소서풍’은 김용 소설 중 유일하게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으로 서역 한 마을에 버려진 한족 소녀 이문수(李文秀)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다.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63년, 김용은 불법(佛法)을 지키는 여덟 신장(神將)인 [[천]](天)·[[용]](龍)·[[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를 소재로 한 ‘[[천룡팔부]](天龍八部)’를 선보였다. 북송과 거란족 사이 요(遼) 분쟁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은 작품으로, 거란인이면서 한인으로 자란 비극적 영웅 [[소봉]], 무예를 싫어하면서도 수많은 절기를 몸에 익히는 [[단예]], 파계한 소림사 승려 [[허죽]], 멸망한 ‘대연국’의 후예로 왕조 부흥을 꿈꾸는 [[모용복]] 등 네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화려한 무공 묘사가 압권이다. 1964년, 김용은 잠시 무림 세계를 떠나 불법 세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때 발표한 작품 ‘[[연성결]](連城訣)’은 불가에서 말하는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 즉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욕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毒)을 주제로 삼았다. 작품 도입부에서 주인공 적운이 모함을 받고 투옥되는 상황 묘사는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연상시킨다. 실제로는 김용이 어린 시절 집에서 일하던 종 ‘화생’에게 들은 기구한 과거사를 모티프로 한 것이다. 본명이 ‘개잡종(狗)’인 석파천을 주인공으로 한 1965년작 ‘[[협객행]](俠客行)’도 인기를 끌었다. 시인 [[이백]]의 동명 시를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품성 바르고 순수한 주인공이 강호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1967년 김용은 [[임청하]]의 명연기로 널리 알려진 영화 ‘[[동방불패(영화)|동방불패]]'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소오강호]](笑傲江湖)’를 세상에 선보였다. 소오강호는 등장인물 유정풍과 곡양이 만든 소(蕭·피리)와 금(琴·거문고)의 합주곡. 문자적 의미는 ‘강호의 속박을 비웃는다’는 뜻이다. ‘정(正)과 사(邪)의 대립은 모호하다’는 작품 주제를 상징한다. 정파와 사파의 의견 차이에 구애하지 않고 우정을 지켰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무림들의 상황을 풍자한 제목이다. ‘동방불패’는 이 작품 속 일월신교 교주로 절대 무공을 지닌 존재다. 김용 소설 중 드물게 [[허무주의]]적이고 비극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역사적 배경도 불명확하다. 3년 후인 1970년 김용은 춘추시대 오(吳)나라에 복수를 다짐한 월왕 [[구천]]과 충신 [[범려]] 앞에 뛰어난 검술과 지혜를 가진 여인이 나타나 오를 멸망시키는 걸 도왔다는 ‘월녀(月女) 전설’을 모티프로 한 소설 ‘월녀검(月女劍)’을 완간했다. 1972년에는 최후의 대작 ‘[[녹정기]](鹿鼎記)’를 마무리했다. 3년간 계속한 연재의 결실이다. 청 최전성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아 강희제 등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허구적 상상력과 절묘하게 엮어 쓴, 이른바 ‘신필(神筆)’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김용은 더 이상 새로운 소설을 쓰지 않았다. 출간한 작품을 개작해 재출간하는 데 집중했다. 언론사 사주로서 회사 경영과 사업 확장에도 매진했다. 명보 자매지로 석간 명보만보(明報晩報), 월간 명보월간(明報月刊), 주간 명보주간(明報週刊) 등을 잇달아 창간했다. 출판계로 영역을 넓혀 명보출판사, 명창(明窓)출판사를 설립했다. 1991년 지주회사인 명보기업유한공사를 세워, 언론사 최초로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도 했다. 당시 명보그룹 순이익은 1억 위안에 달했고, 상장 직후 김용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4년은 김용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해 5월 김용 전작 15종 36권이 ‘김용작품집’으로 공식 출판됐다. 그해 중국 ‘독서잡지(讀書雜志)’는 20세기 중국 대표 소설가를 꼽으며 [[루쉰]], [[선충원]], [[바진]]에 이어 김용을 네 번째로 올렸다. 이후에 조사한 중국출판과학연구소가 발표한 '전국 국민 열독 조사'에서 김용은 바진, 루쉰, [[충야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이 당시 [[베이징대학]]에서 명예교수직도 받았다. 옌자옌(嚴家炎) 베이징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명예교수직 수여식에서 “김용의 창작 실천은 또 하나의 [[문화대혁명]]이고, 조용히 진행된 혁명”이라고 상찬했다. 이듬해 베이징대에 ‘김용 소설 연구’ 과목이 정식 개설됐다. 1997년에는 홍콩 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상업적 성공, 문학적 성취에 더해 언론사업 성공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김용은 노년에 향학열을 불태웠다. 2005년 81세의 나이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0년 86세 때 역시 케임브리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용의 무협소설들은 동서양의 수십개국에 번역되었으며, [[대만]]에서 1천만부, [[중국]]에서 3억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적판 미포함, 해적판까지 포함한다면 어마어마할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