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수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BO 40주년 특집 김용수 일러스트.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BCbluedragon41.png|width=100%]]}}} || || '''{{{#ffff00 MBC 청룡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94Kimyongsu.jpg|width=100%]]}}} || || '''{{{#white [[1994년 한국시리즈|{{{#white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 || 일찍 야구를 시작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동대문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김용수 본인은 과거를 회고하며 남들보다 2년 늦게 시작한 것이 오히려 16년의 장수를 가능케 했는데, 친구들은 다른 훈련할 때 본인은 죽어라고 기본기 훈련만 계속했고 그것이 나중에 돌아보니까 그 때 기본기를 착실하게 훈련한 것이 부상 없이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자평했다.][* 참고로 야구부에 들어가게 된건 중학교 1학년이지만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한 건 봄방학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중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스톡킹에서 밝혔다.] 참고로 본래는 3루수였는데 선발 투수 한 명을 새로 뽑아야 하는 상황에서 감독이 김용수의 선배들에게 누가 적합하냐고 물어보자 만장일치로 다 김용수라고 답했다고 한다. [[서울 청원고등학교 야구부|동대문상업고등학교]][* 공식적으로 동대문상고는 2003년을 끝으로 없어졌지만, 동대문상고 야구부가 같은 재단인 청원고로 이어졌기 때문에 두 팀을 하나로 본다.]와 [[중앙대학교 야구부|중앙대학교]] [[체육교육과]](79학번)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인 [[한일은행 야구단]]을 거쳐[* 국가대표 합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상무 야구단]]의 프로 선수 입대가 허용이 안되어서 실업야구를 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국가대표가 되어 병역을 마치기는 했다.] 1985년 계약금 2,300만 원에 [[MBC 청룡]]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이상군]], [[선동열]], [[류중일]] 등과 함께 [[1984 LA 올림픽|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G 트윈스]] 최초의 [[영구결번]]식을 가진 선수'''(41번)이며, [[KBO 리그|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의 200세이브-100승을 거둔 선수이기도 하다. 다만 41번이라는 등번호는 애초부터 김용수가 원해서 달았던 번호가 아니었다. 훗날 김용수 본인이 이에 대한 비화를 공개했는데, 본래는 대학 시절부터 쓰던 14번을 달고 싶어했다. 그러나 김용수가 MBC 청룡에 입단했을 때 14번의 원래 주인은 선배 투수였던 [[이광권]]이었다. 김용수는 이광권에게 "선배님, 14번 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물어봤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결국 남는 등번호 중에 마음에 드는 번호를 고르자고 해서 38번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룡 감독으로 복귀한 [[김동엽(1938)|김동엽]] 감독이 "내래 [[38선|삼팔따라지]]라서 38번을 써야갔서!"라고 말하며 38번을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해서 달게 된 번호가 주인 없이 남은 41번이었고, 별 수 없이 41번을 달게 되었다. 등번호를 41번으로 결정한 이후 김용수는 팀 동료들에게 "너 얼마 못하겠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본인도 맘에 들었는지 이광권의 은퇴 이후에도 41번을 계속해서 달았다.[* 본인이 염두에 두지는 않았겠지만, 우연히도 41번은 1960~1980년대 메이저리그의 명투수인 [[톰 시버]]의 번호이기도 했다.] 이러한 비화들은 30번대 이후 등번호가 '2군 선수들이 다는 등번호'라는 당시의 선입견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프로 입단 2년째인 1986년 1점대 방어율에 세이브왕을 차지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1987년과 1989년에도 세이브 1위를 기록하며 19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팀의 마무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팀이 LG로 바뀐 1990년에 [[정삼흠]]과 보직을 바꾸어 선발로 전환했는데, 포크볼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12승을 거둠과 동시에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2승을 혼자 따내 팀을 창단 첫해 우승을 이끌며 MVP를 차지했다. 1991년에도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무리하게 굴려진 여파로 인해 좌골 신경통이 발생하면서 1992년은 은퇴 직전까지 몰리는 부진을 겪게 된다.[* 그 때 나이가 33살인데, 30대 중반만 넘어가도 바로 은퇴하던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 때 회복을 못 했다면 그대로 은퇴했을 확률도 높다.] 그는 선배 [[박철순]]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했고 부상에서 회복된 1993년에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복귀하는데,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함과 동시에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초의 2회 한국시리즈 MVP 수상을 달성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선동열]], [[정명원]], [[김경원(야구)|김경원]] 등 강력한 마무리들이 등장해서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아지기도 했다.[* 3년 연속 30세이브의 꾸준함을 보여준 김용수에 비해, 선동열은 1993년에 역대 최저 ERA인 0.78을 기록했고, 정명원은 1994년에 최초로 40세이브 달성과 동시에 투수 골든글러브를 따냈으며, 김경원은 1993년에 ERA 2위에 혹사로 무너지기 전까진 강속구 마무리로 이름을 날렸다.] 1995년 6월 14일 잠실 OB전에 10회말 2사2루에서 타석에 들어섰고 삼진으로 물러났다.[* 만약 여기서 안타를 쳤으면, 훗날 2001년의 송진우보다 앞선 투수 첫 끝내기 안타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해당 장면은 당일 [[MBC 뉴스데스크]] 방송 도중에 중계되었다.] 시즌이 끝난 이후 연봉 협상에서 트윈스 최초의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1996년부터는 혹사와 척추분리증으로 선발이 힘들었던 이상훈을 대신해 선발로 돌아와서 성공적인 선발 복귀를 했으나, 다음 해 마무리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었음에도 김용수가 신임 감독이던 [[천보성]]에게 우겨서 쭉 선발로 뛰면서 이상훈은 1997년에도 마무리로 뛰게 된다. 대신 이상훈 부럽지 않은 활약으로 매년 12승 이상을 해 주었고, 1998년에는 18승으로 다승왕을 기록하며 최고령 다승왕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2시즌 동안에도 노장의 관록을 보여주며 2000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KBO 리그 최초로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지만, 은퇴식은 하지 않았다. 은퇴식을 본인과 구단 모두 원하지 않았고, 은퇴 당시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 실제로 현역 생활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마무리 자리를 [[장문석]]에게 넘겨 줘서 기록으로만 따졌을 때는 6승 4패 4세이브에 [[평균자책점]] 5.24였지만, 소화한 이닝은 무려 '''127이닝'''이었다. 김용수는 8월 즈음에 성적이 하락세를 타자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이후 성적이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현역 연장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광은 감독이 은퇴를 종용하디시피 했고, 구단 역시 이에 동조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김용수는 마무리 훈련 도중 “만약 구단이 은퇴시킨다면 구단이 마련해 주는 은퇴식이나 은퇴 경기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은퇴식, 은퇴경기 모두 이뤄지지 못했다.] 그렇게 김용수는 2000년 11월 20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역 은퇴를 밝혀야 했다. 프로입단 16년만의 일이었다. [[이광은]] 당시 감독과[* 현역 마지막 시즌이던 2000년 시즌 중 김용수가 이광은 감독의 투수 운영 건을 가지고 항명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말년에 이광은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대표적으로 그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던 두산과의 2000년 플레이오프 6차전에서는 9회 2사까지 김용수가 잘 막아놓았던 상황에서 무리하게 [[장문석]]으로 교체되어 마운드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결과는 장문석이 동점/역전 홈런을 연달아 허용하고, LG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무엇보다도 이광은 감독과 김용수의 나이차는 불과 5살밖에 차이나지 않았기에 젊은 감독이던 이광은의 입장에서는 노장 선수였던 김용수를 껄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광은 본인이 상당히 선수들을 휘어잡으려는 스타일이었으니, 이에 반기를 든 선수단의 리더인 김용수가 더욱 마음에 안 들터.] LG 구단이 등 떠밀듯이 은퇴만 시키지 않았으면 마무리로서는 아닐지라도 [[중간계투]] 투수로 몇 년 더 뛰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용수 본인이 만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을 정도로 스스로 몸 관리를 잘 하는 스타일이었던데다가 더군다나 후임 감독이 [[이광은]]과는 정 반대로 베테랑 선수를 신뢰하~~[[박정진|다 못 해서 갈아먹]]~~은 [[김성근]]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최소한 2002년이나 2003년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텟을 봐도 조정방어율은 리그 평균치보다 낮았지만 조정FIP은 111.8으로 낮은 편이 아니였으며 2000년이 꽤 심한 타고투저 시절이였다는 걸 상기하면 최소 1년은 더 두고 볼만한 상황이였다.] 은퇴기자회견에서 김용수는 은연 중에 “1년 정도는 더 뛰고 싶었는데…”라며 기자회견 중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http://nohitnorun.com/271|불암콩콩코믹스 레전드 - 김용수 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