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환(1887) (문단 편집) == 생애 ==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던 의성 김씨 학봉종가[* 학봉(鶴峯) [[김성일(조선)|김성일]]의 종가.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73&docId=540960&categoryId=46673|학봉종택]]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으며, 이 마을에는 현재도 [[의성 김씨]] 집성촌이 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가이자 문체부 차관 및 서울 강서구청장을 역임한 [[김도현(1943)|김도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의 종손으로,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조선)|김성일]]의 13대손이며 역시 독립운동가로 의병활동을 창의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이기도 했다. 김흥락은 영남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유림의 종장이었는데,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림에 통문을 돌려 전국에서 처음으로 을미의병을 창의하였고, 창의대장에 추대되었으나 노령을 이유로 물러났다. 그러나 제자와 문중을 총동원해서 의병활동을 독려하였고 이는 훗날은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었다. 김흥락의 제자가 700여 명이었는데,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만 60명이 나왔고[*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이고, 역시 임시정부의 [[김창숙]],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만주 [[독립군(한국)|독립군]] 활동을 한 [[이승희(독립운동가)|이승희]], [[김대락(1845)|김대락]], 김원식 등이 뒤를 잇는다.], 청계공 이후 안동에 세거해온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훈장 받은 사람이 총 106명인데, 이 중에서 학봉 직계에서만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김용환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1896년 의병활동을 벌이던 의성 김씨 일족인 의병 포대장 김회락(할아버지 김흥락과는 사촌지간)이 패전하여 학봉종택에 은신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김회락을 잡아내고,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을 포박해서 마당에 꿇어 앉게 하고 집안을 약탈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김회락은 총살당했다.[* 이 때 김회락은 유언으로 '내 자손들에게 보수(報讐, 원수를 갚음)를 가르쳐라!'를 남겼다고 한다.] 김용환은 어릴 적에 이 모습을 목격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이후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1908년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였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는 등 영남/충청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에 함께 했었다.[* 이때 같이 활동한 인물이 역시 이쪽 집안인 김현동(1876. 12. 24.~1927. 7. 10.)이다. 김현동 역시 대통령 표창(1983년),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을 받았다.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결국 안동으로 돌아왔으며, 1921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 안동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서로군정서와 연결된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원식과 김찬규.]와 연결되어 독립운동단체 '의용단'에서 활약하였다. 적극적인 군자금 모금 및 친일 부호 및 매국노들에게 '사형선고장'을 발부/발송하고 자금 징발 활동을 벌였으나, 1922년, 결국 [[일본제국 경찰]]에 세 번째로 체포됐다. 이후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줄 온갖 방법들이 틀어막힌 김용환은 결국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다 포기한듯이 재산을 도박에 쏟아붓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