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환(1887) (문단 편집) === 도박활동과 진실 === 한번 [[도박]]에 빠지기 시작하자 벌이는 도박판이 어마어마해서, 그 많던 가산을 급격히 탕진하기 시작했다. 세간의 인식은 의성 김씨 집안의 '''[[도박]]꾼이자 [[파락호]].'''[* 양반 가문을 직접적으로 몰락시킨, 또는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을 경멸조로 부르는 말.] 경북 안동 출신의 저술가로 <양반동네 소동기>, <나의 양반문화 답사기> 등의 저자인 윤학준 교수는 '조선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주역인 김남수와 함께 이 사람을 꼽았다.[* 정작 이 세 사람 모두 난봉꾼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일을 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다만 큰일을 하다보니 가세가 기운 탓은 있지만.]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하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베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만약 베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베팅에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 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쓸어담고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방 십 리 이내로는 학봉종택의 땅이 아닌 곳이 없었다는 정도로 막대했던, 현재 시가로 '''200억 원''' 상당의 재산과 전답을 도박으로 말아먹은 것도 바로 이 시기는 벌어진 일. 그 꼬락서니를 보는 문중의 자손들은 '집안 말아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집과 전답을 되사주곤 했다.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동딸이 시집갔을 때 시가(媤家)[* 조선 말 의병이자 유생이었던 석간 서효원의 집안으로, 청송 마평 서씨 석간종택이다.]에서 장롱을 마련하라고 준 돈 역시 도박으로 탕진, 결국 외동딸은 친정 할머니[* 친정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신 오동나무 장롱이다. 아래 김용환의 딸이 쓴 시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보면 큰 어매가 쓰던 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안동 지방에서 큰 어매는 친 할머니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안동 출신의 [[이동형]]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는 큰어머니(?)가 쓰던 장롱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용환이 종손(종갓집의 큰아들)이기 때문에 큰어머니가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오류로 보인다. 그 외 친정어머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정확히는 친할머니가 큰어매다. 안동지방의 나이 지긋한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다 안다.]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게다가 시가의 가세가 기운 데다 시집온 지 3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자 시댁에서 그 헌 장롱이 귀신들린 장롱이라며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숴서는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고. 가정에 대한 무관심이 도를 넘어 딸의 농값을 가로채고선 딸이 시집을 가던 날에도 감감 무소식이었던데다, 명색이 학봉종택 종손의 여식이 이런 수모를 당할 정도니 [[문중]] 사람들이 김용환을 엄청 욕했지만 그는 "집안에 '학봉(가문의 조상 김성일)'과 '난봉'이라는 [[패드립|두 봉황이 나왔으면 된 거 아니냐?]]"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정에 무관심하여 도박에 탐닉하던 것으로 보이던 그의 행동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 그의 재산은 비밀리에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졌다.''' 도박판에서 돈을 날리는 모습은 사라진 재산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던 것. 그렇지만 일제의 감시망이 워낙 지독하다 보니 이럼에도 결국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일제가 만주 독립군 군자금을 추적하며 희미하게나마 그 일부가 '안동의 김용환에게서 나왔다'라는 증언을 받아낸 것에 기인한 것.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503605|#]] 딸이 시집간 날에 행방이 감감 무소식이었던 것도, 도박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군자금 관련 혐의로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어서라고. 윤학준은 <양반 동네 소동기>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 그 전년 여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친한 친구인 K로부터 김용환 씨를 '독립 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지금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참봉 할배(김용환 씨를 말함)가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을 리가 없어. 참봉 할배의 기행, 난행은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특고]]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고, 사실은 독립 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보내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확증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그럴 듯한 흔적은 몇 개 있다고 했다. 사실 저렇게 "이기면 내 것 져도 내 것" 식으로 도박을 했는데 재산이 늘어나긴커녕 오히려 줄었다면 이상하긴 할 것이다. 자료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저 이야기의 시점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990~1991년 정도이다. <양반 동네 소동기>의 원전인 <나의 양반 문화 탐방기>의 출간이 1995년 3월인데, 이 책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된 <온돌야화>와, <역사에 얼룩진 한국-한국양반기행>을 하나로 합쳐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것으로 두 책의 출간은 1983년과 1993년이다. 집필 기간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늦어도 1992년에 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인데, '그 그 전년 여름'이라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1~2년 전인 1990~1991년 사이로 추정된다. 독립 유공자 추서는 1995년으로, 아무리 시간대를 좁혀 잡아도 4~5년의 시간차가 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추가적인 자료를 모아서 제출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낡은 정보가 개정증보판을 내면서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혼란을 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