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희 (문단 편집) === [[롯데 자이언츠]]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3루수|'''{{{#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3루수 부문 수상자 (1982, 1983)}}}''']]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지명타자|'''{{{#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1985)}}}''']] || || [[파일:미스터 올스타 김용희.png|width=100%]] || |||| {{{#ec1c24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김용희'''}}} || 1982년 프로 출범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묶이지 않은 것에 대해 [[최동원]], [[심재원(야구선수)|심재원]] 등이 대표로 뽑히면서 프로 입단이 1년 늦어져 전력에 타격을 입은 롯데에 대한 배려라는 말과 이미 당시에 대표로 뛰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김용희의 몸 상태는 당시 디스크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 디스크 통증은 프로 선수 생활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인 1994년엔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결국 전반기 종료 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올스타전은 각 팀의 감독들이 코치로 출전하게 되지만 이 디스크 수술탓에 김용희는 불참하고 대신 [[권두조]]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올스타전에 참가했다.] [[https://m.sports.naver.com/kbo40/history/5|히스토리 05 'Mr.올스타' 김용희의 '만루홈런 인생']] 그럼에도 1982년 초대 [[KBO 올스타전]] MVP로 선정된다. 당시 3차전까지 열린 올스타전에서 2차전까지 3홈런을 치며 맹활약한 [[김용철(야구)|김용철]]을 제치고 선정된 이유는 그가 3차전에서 날린 '''역전 만루홈런'''의 힘이 컸다.~~ 역시 인생은 한방. 역전의 사나이!~~ 그리고 1984년에도 4타수 4안타를 치면서 다시금 올스타전 MVP의 영광을 안는다. 부상으로 받은 차만 두 대.[* 다만 둘 다 자신이 직접 운전한 적은 없는데, 1982년 MVP 수상 당시에는 운전면허가 없어서 운전면허가 있는 부인이 대신 몰았고, 운전면허를 딴 1984년에는 미스터 올스타로 뽑힌 후 동, 서군 선수와 코칭스태프 전원에게 한턱을 쏜 뒤 '''남는 차 한 대는 후배가 달라고 졸라서 그냥 줬다'''는 [[대인배]]스러운 일화를 남겼다.] 아울러 실업야구 시절인 1980년에도 실업야구 올스타전 MVP를 받았다니, 올스타전과 인연이 깊은 선수라고 하겠다.[* 당시 실업야구 올스타전 부상은 전축이었다고 한다.] 이 만루홈런은 2023년 [[채은성]]이 기록하기 전까지 41년간 유일한 올스타전 만루홈런이었다. 골든글러브를 세 번 받았을 정도로 활약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허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 무대에서는 아마시절처럼 슈퍼스타로 군림한 것은 아니다. 일곱 시즌 동안 뛰었지만 3할을 넘긴 시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풀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고, 20개 이상 홈런을 친 적도 없다. 하지만 최초로 롯데를 상징하는 선수였고 롯데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후덕한 인품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구단 고위층부터 팀 동료와 후배까지 믿음을 산 선수였다. 축구로 따지면 [[FIFA 발롱도르]] 초대 수상자인 [[스탠리 매튜스]]와 비슷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