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운용 (문단 편집) == 생애 == [[연세대학교|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무고시,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의 전신)를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겪었다. 서울 수복 직후 군에 입대하여 미국 육군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각종 [[외국어]]에 능통해 제11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의 [[전속부관]]을 맡기도 했다. [[텍사스 대학교|텍사스 대학교/엘패소 캠퍼스]]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수여받았다. 1961년 [[장면 내각]]의 총리 의전추서관을 역임했고, 1962년에는 [[동덕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하다 1963년부터는 주미 한국대사 참사관 등을 맡으며 주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대통령경호실에서도 잠깐 일했다. 1965년에는 제20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태권도협회를 이끌던 2세대 태권도 원로인 이종우, 엄운규 등에 의해 태권도계로 영입되어 1971년부터 20년 간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역임했다. 1972년 기존 [[국제태권도연맹]](ITF)의 수장 [[최홍희]]가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며 [[캐나다]]로 망명을 가 본부도 [[토론토]]로 옮기자, 이에 대비되는 단체 격으로 1973년 창설된 [[세계태권도연맹]](WTF)의 초대 총재를 맡게 된다. WTF 창설 이듬해인 1974년에는 국제 태권도 대회인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김운용은 태권도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태권도가 국제스포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화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975년 10월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에 가입하여 태권도가 세계 스포츠계에 정식으로 인정받는 스포츠가 되었다. 이어 1980년 8월에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승인을 받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어 태권도를 [[1988 서울 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채택시키면서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9년에는 NOF(국제경기연맹비올림픽종목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닌 스포츠 종목들의 종합 스포츠 대회인 [[월드 게임]]의 창설에 많은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는 월드 게임을 관장하는 기구인 국제 월드 게임 협회(IWGA)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그 자격으로 초대 월드 게임인 [[1981 산타클라라 월드 게임]]의 개회선언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당시 국내 IOC 위원이었던 [[박종규]]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IOC 위원이 되었고[* 박종규의 사망 직후 5공의 주요 실세들이 IOC 위원직에 탐을 냈고, [[전두환]] 대통령이 그 중에 한 명을 선택하려 했는데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이 친하던 김운용을 고집하면서 무위에 그쳤다는 일화가 있다. 1986년에는 스위스 IOC 본부에서, 1987년에는 청와대에서 전두환이 사마란치를 직접 만나 계속 설득했는데, 사마란치는 '''"만약 다른 인물을 고집한다면 한국은 IOC 위원이 없는 상태로 [[1988 서울 올림픽]]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김운용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고 한다.] 아울러 같은 해에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2004년까지 장장 18년 간 회장직을 역임했다. 1992년에는 IOC(수석)부위원장까지 올랐다. 1994년 9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 103차 IOC 총회에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태권도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혹자는 김운용 혼자 다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건 좀 오바고, 태권도가 막 태동되던 1950년대부터 해외에 진출해있던 많은 태권도 관련자들이 인프라를 다져놨기에 가능했다.] 이런 국제 스포츠계의 명성을 등에 업고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장까지 되면서 국내 체육계를 대표하게 되었다. 세계스포츠계에서도 한때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뒤를 이을 차기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까지 했으나 결국 IOC 위원장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 시절 그의 직책은 [[국기원]]장, [[대한태권도협회]]장, [[세계태권도연맹]](WT) 총재,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장,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국제경기연맹비올림픽종목회의(NOF) 의장 등이었다. --일 제대로 할 수나 있나-- 물론 간판의 성격이 짙고, 실질적인 업무는 실무자들이 많이 하긴 했다. 예를 들어 태권도 같은 경우엔 엄운규, 이종우 등이 실무적인 일은 많이 주도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던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와 [[국회의원]]까지 했는데, 사실 김운용은 처음엔 체육인이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수 차례 고사했으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선거 출마가 예상되는 시점부터 당시 [[해외]] [[언론]]의 공격이 거세지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 부위원장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본인은 자신이 국회의원 되면 체육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응했다고 한다. 다만 국제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양반이 그동안 안하던 정치에, 연이나 성향도 얼핏 멀어보이던 여당으로 진출한건 냉정하게 보면 권력 욕심도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여튼 정치가 정치다보니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 좋은 소린 못들었다. 어쨌든 그렇게까지 하면서 IOC 위원장직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고, 도리어 후술되어있듯 이때 불거진 부정부패 스캔들로 [[구속]]도 당한다. 가석방된 이후엔 비교적 조용히 말년을 보냈는데, 2천년대 후반엔 당시 [[문대성]] 선수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도전했을 때 --화해했는지--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등 옛 지인들을 만나 지지를 부탁하는 등 측면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2017년 10월 3일, 오전에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