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원봉 (문단 편집) == 가족 == || [[파일:김원봉의 가족.jpg|width=100%]] || ||김원봉이 국외에서 항일무장투쟁 중일 때 국내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그의 가족과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원봉의 부친이며 그 옆이 김원봉의 계모다. 앞줄 중앙이 김원봉의 막내 동생 김학봉이다. 뒷줄 오른쪽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의열단 단원이다.|| || [[파일:첫아들 중근을 안고 있는 김원봉.jpg|width=100%]] || ||1946년 여름, 김원봉이 첫아들 '중근'을 안고 밀양의 표충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김원봉은 총 3명의 여인과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봉이 가장 처음 결혼한 여인은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이었다.[*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김학준, 민음사, 2005)에서.] 하지만 최씨 성을 가진 여인이라는 사실 이외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본처와 사별 후 [[박차정]][* 여성 독립운동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냈다.]에게 새장가를 든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뻘인데, 박차정의 외당숙이 바로 김두봉이다. 박차정의 어머니가 김두봉의 사촌동생이라고. 김원봉과 박차정은 1931년에 결혼하였다. 박차정은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총상을 입어 후유증이 생겼고, 성병에 감염되어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정화암]]은 김원봉의 본처인 최씨와 박차정이 모두 화류계에 밥먹듯이 드나들었던 김원봉으로부터 [[성병]]에 감염되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이고 둘째는 김철근이다. 연구자들은 김원봉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될 때 부인은 물론 아들들도 모두 피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물급 월북/납북인사들의 소식은 [[냉전]] 시기에도 판문점 채널[* 북한 기관지나 언론인을 통한 북한의 공식 입장이다.]이나 [[조총련]] 계열 재일교포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졌고, 특히 국가통제가 일시적으로 붕괴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외부로 알려진 바가 많았는데, 김원봉 일가의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이는 50년대 중후반 김일성의 숙청작업으로 숙청된 인사들의 공통점인데, 숙청 후 시간이 오래 지나서 숙청된 인사들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남은 가족들 중 동생들은 한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모두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남동생 김봉철과 여동생 김학봉은 생존했다. 김봉철은 [[4.19 혁명]] 당시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했는데, 이후 이를 근거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옥살이를 하다 1986년 사망하였고, 2010년 유족들의 노력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재심 결정 및 무죄를 선고받았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052086|#]] 여동생 김학봉은 고향 밀양에서 살다가 2019년 2월 24일 사망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065399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