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원용 (문단 편집) == 생애 == 1922년 8월 24일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출생했다. 1929년 평북 영변보통학교에 입학, 1931년 경성 혜화공립심상소학교로 전학 후 193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진학, 1940년 [[경기중학교]](1938년 경성제일고보에서 개칭) 졸업 후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제17회, 문과을류)에 입학했다. 전시 수학연한 단축조치로 반년 빠른 1942년 9월 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동양사를 전공했다. 학부 역시 전시 수학연한 단축조치로 반년 빠른 1945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동양사학전공)를 졸업하여 문학사를 취득했다. 해방 후 1947~1961년 국립박물관(舊 [[조선총독부]] 박물관, 現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 연구과장으로 근무하면서 [[http://m.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188100014|김재원]](독일 뮌헨대학 졸업) 박물관장과 개성 삼재라 불리던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및 이홍직, 윤무병, 김정기 등과 함께 박물관을 이끌었다. 그러다 국립박물관이 한국전쟁 직후 1954년 당시 열악한 인력 사정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전문 박물관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김원용을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미술사 전공)에 [[http://sbook.allabout.co.kr/magazine/museum/sm-10/pt-post/nd-112|유학]]시켰고, 이를 통해 김원용은 1954~1957년 뉴욕에서 유학하며 알프레드 살모니(Alfred Salmony) 지도하에 『신라토기의 연구』(1960)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유럽의 고고학 유적을 둘러보고 1968년에는 영국 런던 대학으로 단기 유학을 가서 전문 고고학을 배웠다. 1947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했고,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며 교수로 부임하여 사실상 홀로 학과를 만들었고([[http://www.archaeology-arthistory.or.kr/?mcd=saa0005a&me=bbs_detail&idx=9146|링크]]) 이듬해인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였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8년부터 1992년까지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있었다. 1970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종신)이 되었다. 1971~1974년 한국고고학연구회장, 1976~1977년 고고학회장, 1979~1980년 역사학회장, 1985~198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다. 1976년 8월 28일 오후2시에 한국고고학회를 창설했다. 퇴임 후 1988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1990~1993년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을 역임하였다. 1993년에 사망하였고, [[https://www.snu.ac.kr/about/winners/pride/1993/73|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되었다. 묘소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유적인 [[전곡리 선사유적지]]이며, 유언에 따라 무덤 없이 화장 후 유적지 내에 산골하였다[* 지금은 사적 지정된 곳에서 어떠한 장례 의식이나 굴착 행위도 불법이지만 당시는 가능했던 시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