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윤상(무술인) (문단 편집) == 일생 == 1974년 [[합기도|무술]]을 수련하던 김윤상이 자신의 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마흔이 넘어 최용술를 찾아가면서 최용술과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극장에서는 영화 시작 전에 [[대한늬우스]]를 방영하였는데, 그때 나온 합기도 영상이 계기가 되어 무력(武歷)이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후일 합기도에 대한 한계를 느끼던 중[* 합기도의 기술이 발차기나 당사자의 힘 만을 사용한, 우왁스런 기술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이가 더 들면 과연 기술을 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최용술 도주의 시연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직접 배워야 겠다는 결심을 하여 [[합기도|협회]] 측에 최용술의 소재지를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그의 근황을 모른다고 하거나, 심지어 죽었다고 하는 등이었기에,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고생 끝에[* 최용술의 소재지였던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유술을 가르친다는 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다, [[장인목]]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김윤상에게 '''나도 최 영감처럼 대동류를 했으니, 나에게 배우는 것이 어떠한가?'''는 제안을 하였다고 증언한다.] 최용술을 만나 배울 기회가 생겼으며, 첫 수련 때부터 흰띠를 매고 시작하였다고 한다. [* 사범급이었던 당시 김윤상과 일행들이 검은 띠를 매자, 최용술이 불같이 화를 내며 처음부터 다시 가르쳤다.] 김윤상의 술기가 깊어지던 시기, 최용술 도주는 그에게 직접 도장을 하라는 충고를 하였고, 그리하여 만들어진 도장이 [[용술관]]이다. 최용술 도주가 죽기 1년 전인 1985년에 9단을 직접 수여받았고, 2002년 4월에는 최용술 대구종가로부터 정식으로 합기유술의 3대 도주[* 2대는 최용술의 아들인 최복열이었으나, 합기도 통합 시도 중 사망하였다. 그 이외에는 장진일 또한 2대 도주로서 해외를 담당토록 하였다.]로 추대되었다. 최용술의 손자 또한 김윤상 도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 지금은 독립하여 또 다른 단체를 만들었다.] 최용술의 [[대동류 합기유술|합기유술]]을 원형 그대로 가르쳤으며 스승인 최용술과는 각별한 관계로[* [[최용술|스승]]의 행적을 따라 [[https://images.app.goo.gl/13uEX6WuGSLLo5Ze7|대동류 종가를]] 비롯하여 수시로 일본 각지를 방문하며, 스승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그가 사망 직전까지 계속해서 운동을 쉬지 않고 합기도만 고집했던 이유도 수련을 계속하라는 최용술 도주의 유지를 받드는 의미라 하였다. 유파가 난립하고 스승을 부정하는 일도 생기던 이전의 사례들과는 대비된다. 2021년 6월 23일 새벽 5시 별세했다.(향년 87세)[[https://mookas.com/news/1804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