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윤후 (문단 편집) == 생애 == [[경기도]] [[용인시|용인]]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출가해서 승려가 되고 백현원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백현원이 지역의 명칭인지, 사찰의 명칭인지, 가족 관계는 어떠한지, 어떻게 승려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을 세운 장수치고는 기록이 부실한 편.[* 다만 원래라면 전투와 거리가 멀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2번이나 전투를 이끌고 승리를 쟁취한 점, 1번째 전투에서 동원된게 군사 훈련을 받지도 않은 일반 [[백성]]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김윤후 본인이 전쟁 전부터 전술적 소양을 쌓아뒀을 가능성은 있다. 어느 전투든지 마찬가지지만 지휘는 [[맨땅에 헤딩]] 식으로 하는게 아니며 지휘관은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임용한]] 박사는 저서 <전쟁과 역사> 3권에서 김윤후가 있었다는 백현원이 관영 [[숙박]] 시설인 ‘원’이고 김윤후는 원과 인근 도로의 [[치안]]을 관리하던 무승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시대 분위기상 김윤후의 기록이 부실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결국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 내정 간섭기를 거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원나라를 상대로 김윤후가 공을 세운 것이 공이 아니게 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새로운 왕조 [[조선]]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국가인데 승려가 전쟁 영웅이라는 이야기가 당시 유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쉽게 나올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살리타이|살리타]]의 대대적인 남하를 막으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처인 부곡은 단순한 토성으로 군량이 있다는 것 외에는 전술적 의미가 거의 없었지만 김윤후의 [[화살]]이 살리타의 [[머리]]를 꿰뚫으며 결국 몽골군이 퇴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윤후가 아니라 이름없는 병사나 부곡민이 사살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고려사]]> 김윤후 열전에 보면 "전투할 때 나는 활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무거운 상을 받겠는가?"라며 "활과 화살이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이 근거인데 이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예의를 차리는 표현인지는 판단하기 나름. 학계의 [[논문]]에는 말 그대로의 의미인 궁수가 아닌 지휘관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래 열전의 기사와 같은 맥락의 말이라고 보면 자진하여 병사로 지원하여 참전한 것이 아니라 난을 피하다 불가피하게 싸운 와중에 세운 공이었다는 의미일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포상과 함께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했지만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 -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 라고 사양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섭랑장(攝郞將)에 임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승려의 지위를 버리고 무신의 길을 걷는다. 21년 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시작되었는데 몽골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있던 [[충주시|충주]]성에 도달하였고 70일간의 혈투가 진행되었다.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자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라고 격려하며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줘 사기를 이끌어 냈다. 결국 몽골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충주성 사람들은 관노나 [[백정]]부터 일반 백성까지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김윤후의 공도 인정받아 감문위 상장군(監門衛 上將軍)에 임명되었다.[* 고려 시대 상장군은 무관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계인 동시에 2군 6위라는 고려의 6개 중앙군 가운데 하나를 총괄하는 직위이다. 2군 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들이 모여서 하는 회의가 '장군방'이라고 불린 [[중방]]이다.]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의 항쟁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노비, 승려, 백성들의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1232년 몽골군이 처음 충주에 쳐들어왔을 때 고을 [[수령]]과 군 지휘부들은 다 [[도망]]을 가고 성을 지킨 것은 노비와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몽골군이 물러가자 돌아온 충주군 지휘관들은 몽골군이 [[약탈]]해 간 고을의 기물과 물자를 노비들이 훔쳐갔다고 뒤집어 씌운다.[* [[임진왜란]] 때 형조 관아와 [[임해군]]의 집이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탔는데 나중에 뭐라 한 적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분노한 노비군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진압되고 만다. 이러니 1258년 충주에 있던 노비와 백성들이 고려 조정과 최씨 무신 [[정권]]에 반감을 가졌으면 가졌지,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던 셈. 김윤후는 이런 사람들을 이끌고 끝내 성을 지켜낸 것이다. 몽골과의 항쟁 중에 [[양민]]은 물론이고 노비들이나 [[천민]]까지 몽골군에 맞서 싸웠던 것은 처인성만이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정규군]]보다 더 잘 싸웠다. 다만, 승전 후 김윤후가 임명된 감문위는 2군 6위 중 전투와는 가장 거리가 먼 부대였다. [[개성시|개성]]의 성문을 지키는 부대로 부대 편제도 1령(약 1,000명)에 불과하고 전투에 나서기 힘든 늙은 병사들이 주로 배속받았는데 실권과는 거리가 먼 한직. 오늘날로 따지면 향토동원 [[사단장]]과 같은 직책이다. 전장에서는 가장 치열한 곳으로 보냈지만 전쟁이 끝나자 한직으로 내몰아버린 것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내쫓겼거나 본인이 몸을 피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씁쓸하다기보다는 이런 전쟁 영웅에 대한 전형적인 대우다. 실권이 있는 자리에 맡길 경우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권력]]을 가질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전쟁 영웅마저 죽여버리는 나라라면 이후에는 아무도 그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대대손손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직위를 내리되 실권은 없는 자리로 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직무는 현대의 향토동원 사단장이랑 비슷할지언정 직급은 군단장 이상이라고 보는게 옳다.] 1259년 동북면([[함경도]]) 병마사가 되기도 했으나 이 때 동북면은 몽골 땅([[쌍성총관부]])이라 의미가 없었다. [[원종(고려)|원종]] 때인 1262년 추밀원 부사, 1263년 수사공우복야까지 올랐고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윤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거의 남아있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