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응국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외야수/1900년대|'''{{{#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2, 1996)}}}''']] || 원래 프로 입단시에는 투수로 입단했으나,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도 프로에서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입단 첫해 시범경기에서 호투한뒤 개막 3연전 삼성전에는 선발투수로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몇경기 부진하자 더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이후에는 1군과 2군을 들락거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 당시 2군은 선수가 부족해서 투수도 타자로 나설 때가 많았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아마야구 시절 타격에도 재능이 있었던 투수 [[안창완]]과 홈런을 누가 많이 치는지 연습배팅 때 내기를 했는데 10개 중 3개를 담장 밖으로 날렸다. 이러한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였고 그 이후로 2군 경기에서 종종 안타를 쳤고 한번은 투수로 나선 경기에서는 만루홈런을 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이 때 타자 전향을 권한 장본인이 [[이성득]]이다. 결국 2년차 시즌인 1989년 말미 롯데는 김응국을 1군으로 불려올렸다. 1990년부터 주전으로 기용되며, 매년 3할 타율-20도루를 달성하고, 삼진보다 많은 사사구를 얻어내는 롯데의 확실한 외야수로 자리잡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롯데 클린업 트리오의 한 축으로 활약하였다. 1991년엔 올스타전 MVP가 되었고, 팀이 우승한 1992년에는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3명 가운데 일원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일종의 우승 프리미엄이었는데, 만약 그해 빙그레가 우승했다면 [[이강돈]]이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96년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사이클링 히트는 단타 - 2루타 - 3루타 - 홈런을 '''순서대로''' 성공시켜 만든 것으로 일명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라고도 부르며, KBO 최초이자 2023년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 이후 1997년과 1998년 연달아 부진하면서 하락세를 타나 싶었지만 [[박정태]], [[펠릭스 호세]], [[마해영]]이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로 활약했던 1999년에는 1번 타자 겸 지명타자로 타격에만 집중하며 .293의 타율에 8홈런 60타점으로 쏠쏠하게 활약하면서 롯데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즌 때려낸 141안타는 자신의 한 시즌 최다기록인 1996년의 143안타에 이어 본인 통산 2위의 안타수. 2002년엔 역사의 남을 역전승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4월 10일 당시 롯데는 9회까지 1:5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투아웃까지 간 상황에서 1,2루를 채운 롯데는 [[박현승]]의 적시타로 1점을 따라갔고 [[김대익]]이 볼넷을 얻어 만루를 채웠다. 그리고 김응국이 마무리 [[김진웅]]을 상대로 역전 끝내기 만루포를 터트려 6-5로 승리를 거뒀다. 이는 '''역대 9회 2사 후 최다 점수 차 역전승''' 기록이며, 김응국 본인은 [[이동수(야구선수)|이동수]]와 함께 '''3점차 뒤집기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한 몇 안되는 선수로 남게 되었다. 통산 3루타 61개를 기록해 [[전준호(1969)|전준호]], [[정수빈]]에 이어 3위에 랭크되어 있다.[* 2020년 7월 21일 [[정수빈]]이 키움전에서 통산 62번째 3루타를 기록하면서 김응국을 넘고 통산 3루타 부문 단독 2위로 올라서게 됐다.] 심지어 '''3개'''의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하기도 해서 역대 1위에 랭크돼있다. 이쯤 되면 '''기록의 사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산 15시즌 동안 타율 0.293, 홈런 86, 타점 667, 도루 207, OPS 0.788을 기록했다. 전성기 시절은 90~99시즌까지라 볼 수 있는데, 항상 3할이 넘는 타율과 8할이 넘는 [[OPS]]를 기록한 중거리형 타자. 도루도 해마다 20개 이상씩 기록하는 호타준족의 타자였다. 1990년대 롯데를 빛낸 몇 안되는 프랜차이즈 외야수라고 할 수 있으나[* 출신이 서울이지만 한 팀에서 데뷔와 은퇴를 했다. 같은 프랜차이즈인 [[김대익]], [[이종운]]과 다른 점이라면 김대익과 이종운은 다른 팀으로 이적했지만 김응국은 끝까지 남았다는 정도.] [[전준호(1969)|전준호]]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지라 전준호가 현대로 이적한 뒤로도 끝없는 전준호 사랑에 2인자 취급을 받은 불운의 선수이다. 그래도 롯데라는 팀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덕분에 롯데 구단 개인 통산 스탯으로는 한동안 다양한 부문에서[* 출장경기, 안타, 볼넷, 득점 등등] 1위를 차지했다. 다만 이마저도 [[이대호]]와 [[손아섭]] 등 출중한 실력을 갖춘 후배들이 등장하면서 그의 기록도 후배들의 뒤로 물러서게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롯데 타자 중 개인 통산 스탯 1위를 차지하는 항목이 있다. 통산 61개의 3루타로 독보적 1위다. 1990년대 전체 야수 중 WAR 7위를 기록했다.[* 김응국보다 위에 있는 선수들은 [[홍현우]], [[김기태(1969)|김기태]], [[장종훈]], [[양준혁]], [[이종범]], [[김동수(야구)|김동수]]였다.] 여담으로 1995년 [[선동열]]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이제야 내 스윙을 하게됐다고 좋아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2년 후 [[롯데 자이언츠]]는 [[해태 타이거즈]]에게 15승을 헌납하며 해태 타이거즈 9번째 우승의 제물이 되고 만다.[* 롯데가 해태에게 거둔 성적은 3승 15패, 철저한 밥이 되었다. 정작 선동열 있을때도 7승 11패 정도는 하던 자이언츠였다.][* 하지만 1997년 롯데가 꼴찌를 했다는 것과 해태가 정규리그를 우승했다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