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익렬 (문단 편집) == 생애 == [youtube(Wv6dPn1LYaQ)] [[1921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하동)|금남면]] 송문리 소송마을 285-1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본]] [[고베대학|고베상업대학]]을 졸업하고 [[학병]]으로 입대해 후쿠지야마(福知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해 복무했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했다.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에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했으며, [[제주도]] 부임 당시 계급은 [[중령]]이었다. 1947년 9월 부[[연대장]]이 되었는데, [[명동]] 거리에서 [[송호성(군인)|송호성]](宋虎聲) 당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의 [[부인]]과 마주쳤는데 부인에게 경례를 안해서 송호성의 눈밖에 나서 제주도로 쫓겨 왔다고. 송호성이 제주도를 귀양지로 썼기 때문에 9연대 고위 장교들은 죄다 송호성 눈밖에 난 인사들이었다고 한다. 12월 [[대전광역시|대전]]으로 영전하는 이치업(李致業)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제9[[연대(군대)|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 [[4.3 사건]] 발발 초기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낀다. 처음 제9연대는 해당 사건을 제주도민과 경찰 및 [[서북청년단]]간의 충돌로 간주[* 광복 직후에 경찰 대부분은 일제 때 기용된 관료나 친일경찰들이 그대로 임무를 수행했고, 좌익 색출을 빌미로 무자비한 강제연행과 고문을 저질렀다. 여기에 더해 북한에서 쫓기다시피 내려온 월남자 출신으로 좌익 세력들에 대한 뒤틀리고 비뚤어진 증오심으로 가득했던 어용 정치깡패인 서북청년단의 패악질까지 겹쳐져서 그야말로 헬게이트였다.]했고 군이 개입할 입장이 아니라고 보았지만,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제9연대는 4월 13일 10명 미만의 특별부대를 파견하고, 김익렬은 이때 성명을 발표한다. > 30만 도민 여러분! 본 연대는 본도에 주둔한 이래 도민여러분의 부단(不斷)의 □□□□ 밑에 (3줄 누락) 도내 각지에서 야기된 전고(前古)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도내 민심은 극도로 동요, 불안에 빠지고 있음으로 본 연대에서는 정부재산 및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사오니 도민제위는 안심하고 직장에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줄 누락) 군기대, 정보부, 파견대 본부에 속히 연락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상기 목적 완수에는 도민제위의 긴밀한 협조에서 기할 수 있다고 믿어마지 않습니다. > - 제주신보 1948년 4월 18일 4월 17일 제주주둔 [[미 육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을 통해 미군정으로부터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게 제주 남로당 무장대에 대한 진압작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이때 김익렬은 '선선무, 후토벌'이라는 진압 원칙을 내세웠다. 4월 18일 맨스필드 중령에게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맨스필드 중령은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이 임무를 맡겼고, 김익렬은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한다. >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 > -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그리고 김익렬은 유서를 써 남겨두고 한라산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金達三)의 아지트로 올라갔다.[* 김익렬은 자신의 유고(遺稿) 《4·3의 진실》('4·3은 말한다'(2) 320쪽)에서 김달삼과는 전혀 초면이라고 했지만, 제주 4.3 사건을 논문으로 발표한 존 메릴(John Merrill)이나 김익렬의 선임 연대장이었던 이치업은 김익렬이 학병 출신으로 김달삼과 동료였으며 제주도에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The Cheju-do Rebellion' 174쪽, '번개장군'·이치업·107쪽) 조병옥도 김익렬의 온건 방침을 비난하면서 이 점을 들어 그를 좌익에 용공분자로 몰아갔다.] 4월 28일의 일로, 당시 김익렬이 김달삼과 협상을 벌인 장소가 구억[[국민학교]]였다고. 김익렬과의 첫 대면 자리에서 김달삼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없었으며,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 악질 친일 경찰, 서청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실시한다면 순종하겠다는 골자의 내용을 피력했다. 김익렬은 72시간 내 양측의 전투행위 중지, 유격대 전원의 즉각적인 무장해제와 더불어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도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며, 김달삼과 유격대 두목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선박을 제공할 용의도 있으며, 이를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 자신의 처와 6개월 된 아들, 그리고 늙으신 어머니.]을 무장대측에 인질로 잡혀두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잡혀두겠다는 제의에는 김달삼도 조금 놀랐는지, "늙은 사람을 산에 잡아둘 수는 없다"며 자신이 지정하는 민가(전 면장 집)에 옮겨와 살도록 하고, 군인의 경계와 출입을 허용했다고 한다.] 김달삼의 제안은 김익렬의 직권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김달삼도 일단 휴전에는 합의를 보았고, 양측은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5월 1일 오전 11시경, 일단의 무장집단이 오라리를 습격하여 주민을 죽이고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 일어났다(오라리 방화사건). 이는 '''경찰들[* 그리고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등 우익 단체.]에 의한 귀순 방해 공작'''이었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nNewsNumb=002375100009|주간조선]]] 5월 3일에도 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일본군 [[중기관총]]과 [[M1 카빈|카빈총]]으로 귀순 중이던 무장대를 습격했다. 5월 5일 제주중학교에서 딘(William F. Dean) 미 군정 장관의 주도하에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군인)|송호성]],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제주지사 유해진,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이 참석해 열린 회의에서 제주 지역에 대한 진압 정책을 의논했다. 김익렬은 오라리를 습격한 것이 경찰들의 소행임을 언급하며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했지만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에게 좌익이라고 매도당했다. 김익렬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김익렬과 김달삼이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임을 회의에서 폭로하며 트집을 잡았다. 이 때문에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다. 딘 장관이 토벌 작전으로 방침을 결정함에 따라 김익렬은 용공분자라는 의혹을 받고 5월 6일 9연대장에서 해임, [[여수시]] 주둔 14연대장으로 전출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이 여수 주둔 14연대는 이후 4.3사건과 매우 관련이 깊은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을 일으킨 그 부대다. 다만, 김익렬은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으므로 반란 자체는 김익렬 본인과는 무관하다. 6월에는 [[박진경(군인)|박진경]][* 김익렬의 후임으로 국방경비대 9연대장이 되었으나 초토화작전을 밀어붙이다 1948년 6월 18일 남로당원 문상길 중위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연대장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받아 조사받기도 했다. 1948년 8월 제13연대장으로 발령됐고, [[6.25 전쟁]] 개전 당시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개성 문산 전투 등에 참여하며 용감히 싸웠고, 1952년 5월 제8사단장, 1955년 7월 제7사단장, 1960년 제1관구 사령관 등의 보직을 맡았지만, 이승만 정권에 찍혀[* 게다가 당시 야당인 [[민주당(1955년)|민주당]]도 자유당보다는 좀 나을 뿐, 반공 성향 자체는 강했던 데다가 당대 야권 정치인들의 거물들 중 한 명이자 민주당 구파 세력의 2대 수장인 조병옥은 4.3 사건 당시 김익렬과 달리 강경 진압을 지지했기 때문에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즉, 정계 인사 대부분을 적으로 둔 상황.] 있었다. 그러다 [[5.16 군사정변]]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군사혁명위원회 전라지구를 맡아 쿠데타에 참여했고, 이후 1962년 제1, 2군단장을 거쳐 1967년 5월 국방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9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다. 예편 뒤 시멘트공업협회장, 인천제철 감사,[* 이때 사장이 [[송요찬]]이었다.] 철강협회 부회장, [[1979년]] 5월부터 [[1981년]] 2월까지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14대 이사장을 지내는 등, 경제계에서 활약하다 [[1988년]] 사망했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7955|제주의 소리]] ] 생전에 [[제주 4.3사건]] 당시 원통하게 죽은 제주도민을 옹호코자 쓴 회고록 《4·3의 진실》을 남겼고, 자신이 죽은 뒤에 출판하라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nNewsNumb=002375100009|주간조선]]]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 [[4.3 사건]]에서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한 의인(義人)이다. 그의 회고록 원본이 현재 4.3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 - 김익렬 회고록 《4.3의 진실》(1969년)[* 해당 자서전은 저자 사후 1년 뒤인 1989년에 공개되었다. 후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