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인식 (문단 편집) == 종합적인 평가 == 위의 장문의 비판에서 알수 있듯이 한화 이글스에서 보여준 여러가지 문제들로 여러모로 한화 팬들과는 좋은 인연으로 남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커리어로 보면[* KBO 통산 감독 다승 3위에 들어간다. 1위인 [[김응용]]이 감독생활 24년 동안 1,554승을 거뒀고, 2위인 [[김성근]]이 23년 동안 1,384승을 거뒀다. '''이 두 감독 외에 통산 1,000승을 거둔 감독이 아예 없으며''', 3위인 김인식과도 격차가 상당히 크다. 3위인 김인식은 18년간 980승을 거뒀다. 그 밑으로 4위 [[김재박]](14년간 936승), 5위 [[강병철]](14년간 914승), 6위 [[김경문]](14년간 896승)이 존재한다. 그리고 김경문 밑으로 7위인 [[류중일]]이 있기는 하나 둘 사이의 간격은 무려 200승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넘사벽 수준인 셈이다.] 결코 무능한 감독이 아니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다섯 손가락안에 들어갈 명장이다.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 시절에는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중재역이자 투수 육성의 역할을 맡아 해태 왕조의 전성기를 만드는 데 공헌했으며, 감독 생활 초창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이광환]], [[김용희]] 등과 함께 자율훈련과 분업화로 대표되는 메이저리그식의 신사고(新思考) 야구를 주도했다. 1994년 선수이탈 파동으로 사분오열된 팀을 추스려 우승으로 이끈 점 또한 덕장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또한 1980년대 [[박영길]]이 내세웠던 빅볼 노선[* 박영길은 1991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 당시 전임 김성근 감독이 선수들에게 주입시킨 컨택 위주의 끊어치는 타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려다 실패하고 1년만에 해임되었고 아예 감독직에서 은퇴했다.]을 이어받아 세밀한 작전보다 타자의 장타력을 극대화하는 공격야구를 추구, 관리야구와 스몰볼 중심이었던 한국야구의 스타일 다양화에 공헌했다. 베어스 시절의 [[타이론 우즈|우]][[김동주(타자)|동]][[심정수|수]] 트리오나 이글스의 [[제이 데이비스|데이비스]]([[덕 클락|클락]])-[[김태균]]-[[이범호]](-[[김태완(1984)|김태완]]) 등 항상 중심타선 만큼은 파괴력있는 거포들로 대부분의 시즌 동안 평균 이상의 득점력과 장타력이 있는 타선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한국 야구에서 타선관리 능력은 손에 꼽히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단, 한화는 그가 오기 전부터 뻥야구 구단이었다. 한화의 뻥야구 컬러를 김인식이 만든건 아니다. 하지만 [[장종훈]], [[강석천]]의 은퇴와 [[송지만]]의 이적, [[이영우]]의 입대로 인해 생긴 타선의 공백을 잘 다듬었다는 점은 인정할 만한 부분. 투수 육성에도 나름 노하우가 있어서 페넌트레이스 중반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커버하는 즉시전력감의 불펜투수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지만, 두산 시절이나 한화 시절이나 키워낸 투수를 너무 과하게 소모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강점을 스스로 깎먹었다. 투수 출신 감독 치고는 타자를 보는 안목도 좋은 편이고 한화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퇴색되긴 했지만 두산에서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한화에서의 말년에는 08년에 기회를 붙잡은 김태완을 제외한 한화의 빅뱃 유망주들은 그의 재임기에 2군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것도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저 그런 베테랑 선수들인 이도형, 윤재국, 김인철 같은 선수들에게 밀려서.[* 그나마 김인식 시절에 기용된 선수 중에서 고동진이 20대로 젊은 축이었지만 2할 5푼도 못 치는 타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한계점이 명백한 수준의 선수였다. 차라리 고동진을 안정적인 백업으로 기용하고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더 맞다.] 김인식은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쥐어짜서 최대한 성적을 올릴 수도 있고 리빌딩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구단이 성적을 원하는지 리빌딩을 원하는에 따라 맞추어주는 편인데, 쌍방울에서 지원이 없다고 때려치우고 나오자 같이 일했던 코치들이 다 해고당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소위 말하는 김인식 사단인 셈인데, [[임신근]], [[유지훤]], [[우경하]], [[강만식]]이 소위 말하는 김인식 사단이었다. 이 중에서 쌍방울 시절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임신근과 OB 시절에 결별한 강만식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두산 - 한화 시절에도 수석코치, 타격코치를 맡아서 함께했을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최대한 구단의 요구에 맞추어주는 편이다. 한화 구단에서 가을야구를 선택하지 않고 리빌딩을 요구했다면 OB(현재 두산)에서 꼴찌까지 하면서 리빌딩을 했듯이[* 성적이 낮을수록 좋은 신인을 뽑을 수 있다. 또 꼴찌를 해야 하는데 나중에 쓸 투수들을 갈아넣을 필요가 없다.] 한화도 젊은 선수 위주로 투수를 갈아넣지 않고 리빌딩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화로 [[홍성흔]]이 첫 FA때 두산에서 찬밥대우를 받자 한화에 영입 요청했으나 어깨가 안 좋아 포수로 못쓰는데[* 더군다나 당시 한화에는 [[신경현]]이 주전포수로 버티고 있었고 백업으로는 심광호가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한화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희근, 박노민, 김기남, 최연오, 정범모 등의 포수 유망주를 쓸어담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홍성흔의 용도는 당연히,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였고 만일 홍성흔이 한화에 입단했더라면 타선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굳이 2010년에 장성호를 사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굳이 왜?라는 답변이 오자 지명타자나 외야로 쓸 생각이었지 포수로 쓰겠냐며 어이없어하면서 포기했다고 한다.[* 당시 한화는 롯데 저리가라 할 정도로 돈을 안 쓰는 구단이었다. 심지어 롯데도 있던 2군 구장이 한화는 없었다. 홍성흔의 성격 상 두산에서 버림받고 스승이 영입 요청을 해오는데 약간 손해보더라도 한화에 갔을 확률이 높았다.] 비슷한 연배나 레벨의 다른 감독에 비해 통산 승률이 낮은 편인데(.487), 이건 김인식 감독이 맡았던 팀들이 대부분 재정과 인프라 지원 면에서 최하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우선 처음 감독을 맡은 팀이 신생팀이었기에 선수층이 빈약했던 쌍방울이라는 점에서부터 이미 말 다했다고 볼 수 있고 김인식 시절의 두산은 그룹 구조조정의 여파로 모기업이 도무지 구단에 돈을 쓸 여력이 없어서 매년 주력 투수와 타자를 팔아 구단 운영비에 보태는 팀이었다.[* 1998 시즌 종료 후부터 두산은 열심히 선수들을 팔았는데, 하락세가 보였다고는 하나 3년 전 우승의 주역이었던 에이스 [[김상진(1970)|김상진]]을 6억 5,000만 원에 삼성에 현금트레이드로 내보냈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대형 포수 유망주였던 [[진갑용]]도 4억에 삼성에 팔았다. 또한 LG에 [[김상호]]와 [[류택현]]을 묶어서 1억원에 현금트레이드 했다. 그리고 1999 시즌이 끝나자 신생팀 SK의 창단지원선수로 [[강병규]]를 10억원에, 2000 시즌이 끝나자 [[강혁]]을 6억 7,500만원에 현금 트레이드로 보냈다.] 심지어는 '''[[김동주(타자)|김동주]]까지 [[KIA 타이거즈]]에게 [[유동훈]]+현금 30억원으로 트레이드'''하려다 정보가 새나가서 포기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김동주는 지켰지만, 2001 시즌이 끝나고 [[이도형]]이 [[강인권]] + 5억원에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2002 시즌이 끝난 후에는 [[진필중]]을 [[손혁]] + [[김창희(야구)|김창희]] + 10억원에 KIA 타이거즈로 보냈다.] 적어도 두산 시절의 김인식은 열심히 구단이 선수팔이를 하는 그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 꾸려낸 팀으로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라도 평가받아야 한다. [[김경문]] 감독 취임 이후 빠르게 세대교체가 된 두산 팬덤에서는 골수팬이 아닌 이상 새로 팬덤에 가세한 팬들은 거의 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 한다. '단기전의 마술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1995년 우승 이후 2000년대 초까지는 오히려 단기전 성적이 상당히 나빴지만[* 1998년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1999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연패로 연이어 탈락.] 2001년에 삼성을 상대로 업셋으로 우승하면서 단기전 능력을 드러냈다. 이후의 포스트시즌에서는 마지막 한 고비를 못 넘고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정규리그 성적이 뒤졌다는 건 애초에 팀의 전력이 뒤진다는 뜻이기에 업셋이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01년 한 번이라도 업셋우승을 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 한화에서도 2005년엔 SK, 2006년엔 현대를 업셋하고 3년간 플옵에 진출해서 한번도 업셋을 당하지 않는 등[* 물론 두산에게 2번 다 무기력하게 스윕당한 건 조금 문제가 있다.] 그 나름의 단기전 실력은 보여줬다. 그리고 만들어준 전력을 가지고 치르는 4번의 국가 대표감독에서 단 한번도 실패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6, 2009 WBC, 2015 프리미어12) 단기전에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한화에서 안 좋은 말년으로 인해 한화팬들에게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거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 이 시기에 한화 선수층이 고갈된 건 사실이고 결국 2012년까지도 [[한대화]] 감독이 재임기간 내내 리빌딩을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그 리빌딩조차도 절망적으로 얇아진 선수층에 선수들 자체의 기본기가 부족하고 제대로 된 2군 구장도 없는 판이니 유망주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팀을 손봐야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다른 감독에 비해서도 유난히 원한 맺힌 장문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 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게는 세대교체를 등한시하여 팀 체질을 악화시킨 부분에서 흑역사로 취급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지만 이후 김인식 감독보다 더 화려한 경력의 [[김응용]] 감독이 9년만에 복귀해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꽤나 많이 주긴 했지만 끝에 가서는 [[송창식]]과 [[안영명]]을 갈아마시며 9-9를 찍고 킬끼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만 남기고 떠났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부임 이후 김인식 부임 시기에는 상상 못했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2016년, [[백인천]]급으로 몰락해버려서 김인식 감독은 어쨌든 짜내는 거라도 잘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https://youtu.be/DCG1YmwE5f4|김인식 관련 다큐]] 그밖에 김인식 감독의 또 하나의 장점으로는 언론에 대해 굉장히 능수능란하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처럼 감독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고 언론을 대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언론의 효율적인 활용은 좋은 능력이다. 일단 충실하게 기사거리를 제공하면서 기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필요한 기사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건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성근]] 감독처럼 어그로를 끄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반작용으로 언론의 과대평가라는 말도 나왔다. 실제 한화 시절의 실정이 가려진 원인도 언론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준 덕분에 일정부분 가려진 덕도 있다. 여담으로 [[노리타(김성근)|노리타]]들이 툭하면 들고 나오는 감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김인식에 비하면 김성근의 혹사는 아무것도 아니다, 김인식 시절에 기반을 엉망으로 쌓아서 그런거다, 그런 건 김인식 시절에나 하던거다 등등의 레퍼토리. 김인식 감독을 들먹여 김성근의 잘못을 가리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아무리 한화 시절 김인식의 실책을 크게 잡아도 야구인생 내내 선수들을 갈아넣고 야구 외적 요소로까지 선수들 억압한 김성근보다는 훨씬 낫다. 게다가 김인식 감독이 안영명, 마정길 등에 가한 혹사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15~16년의 [[살려조]]가 당한 것의 2/3수준에 그친다.[* 물론 김인식이 한화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1시즌 경기수가 지금(144경기)보다 20경기 가량 적은 126경기 체제였던 건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혹사의 유일한 목적이자 혹사를 정당화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팩터인 성적 면에서도 6년간 단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한 김인식>>>>>2년간 수백억 지원받은 김성근이었다...[* 참고로 이 때 한화가 영입한 외부 FA는 내야수 [[김민재(내야수)|김민재]] 1명뿐. 그마저도 4년간 14억이라는 적은 금액에 영입한 건데다가 은퇴 후 코치직 보장이라는 조건을 걸고 영입한 거다. 반면 김성근은 FA로만 [[권혁]](32억), [[송은범]](34억), [[배영수]](21.5억), [[정우람]](84억)이라는 외부 FA들을 선물받았고 내부 FA마저 [[김태균]] 84억에 눌러앉히고 외국인 선수도 [[에스밀 로저스]]나 [[윌린 로사리오]] 등 몸값이 100만 달러가 넘는 선수를 사 주는 등 김인식 때와는 다르게 지원을 빵빵 해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