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인후 (문단 편집) == 評價 == 김인후는 일생에 걸쳐 [[조선 인종|인종]]에 대한 충의는 후대 [[사림]] 유학자들로부터 극렬히 추앙을 받았고, 그의 학문적 조예가 초절하고 기상과 인품이 뛰어났다. > '하서(河西)는 우리 동방의 주자이며, 염계(濂溪)이자, 호남의 공자이다.[* 윤홍식, 오병문, 2006, 조선 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 봉황동래] > 조선 개국 이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河西) 한 사람뿐' >---- > '''[[정조(조선)|정조 대왕]] 評'''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8일[*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선포한 교서] > "평생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 >'''퇴계 [[이황]](李滉) 評''' >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화창한 봄바람에 비온뒤의 달이다.(淸水芙蓉 光風霽月) >---- >'''율곡 [[이이(조선)|이이]](李珥) 評''' > 우리 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 이 세가지 중 한 두 가지에 뛰어나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河西)선생을 종생(鍾生)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 >---- > '''우암(尤庵) [[송시열]] 評[*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 >조선 중기 도학자로 호남에는 김인후,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조선)|조식]], 서울에는 [[이이(조선)|이이]]가 버티고 있었다. >---- > '''우암(尤庵) [[송시열]] 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