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재익 (문단 편집) == 생애 ==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김응묵과 어머니 강병주 슬하 6남 3녀[* 9남매 중 무려 6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중 [[아들/4남 이상|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 김씨]]이며, 본적은 선친의 고향인 [[충청남도]] [[연기군]]이다.] 그의 아버지 김응묵은 6.25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인민재판]]으로 사망했다. 또 김재익의 형 3명이 북한군에 끌려간 후 실종되어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 김재익 가족이 6.25 때 북한에게 당한 비극을 계기로 김재익의 아들 김한회는 훗날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어 북한의 인권문제와 국군포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김재익은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53회)에 입학했다가 [[검정고시]]로 대입자격을 취득한 뒤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외교학 전공으로 입학하여 1960년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 의외로 경제학과 출신이 아니며 석박사는 경제학으로 취득했다. 1955년 정치학과 내에 외교학 전공이 신설되어 1959년 외교학과로 분리되었다. 55학번은 분과 전에 졸업했기 때문에 외교학과로 졸업한 것은 56학번이 최초이다.]를 졸업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사회에 진출했고, 1968~1973년에 걸쳐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한국의 천재'로 불리며 중동과 북유럽 국가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학위취득 이후, 귀국한 김재익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일했지만[* 스탠포드대학에 초청교수로 와있던 남덕우가 김재익에게서 수학적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의 스마트함을 눈여겨 봤다가 귀국 후 경제부총리 자리에 있을 때 그를 특별히 발탁했다. 근데 정작 남덕우는 성장론자고 김재익은 안정화론자라 빛을 보지 못했던게 함정. 하여튼 70년대 당시에는 경제기획원에서 [[강경식(1936)|강경식]] 등과 함께 경제 자율화론자로서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참고로 강경식은 이후 전두환 정부 초기에 재무부 장관으로 5공 경제의 밑그림을 그렸다. 허나 1997년 재경경제원 장관이 되어 IMF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가 주장한 안정노선은 당시 정부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그렇게 1979년에 경제기획원을 사직하고 한국개발연구원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5.17 비상계엄]]를 거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 상임위원장,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분과위원장이 되어 권력의 핵심에 선 뒤,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그의 경제 [[과외]] 선생 역할을 했다. [[경제학]]은커녕 경제 자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하는 김재익의 능력에 감탄한 전두환이 집권 직전 김재익을 불러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자신이 단지 [[얼굴마담]]격으로만 이용될 것을 우려한 김재익은 조건을 달았다. >김재익.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하겠습니다. 다만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저한테 일절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생각한 정책은 앞으로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텐데, 각하께서 그걸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전두환. '''여러 말 필요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제17대 대통령 선거|실천하는 경제대통령 김재익]]-- 실제 전두환 정부 출범 후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김재익에게 많은 권한을 줘서 일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하며, 이 시점에서 1980년대 경제개혁이 막을 올렸다. 특히 물가 안정화 분야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3저호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평도 있지만, 김재익이 물가를 안정시킨 시기는 1982~83년으로 3저호황이 오기 전이다.], 1980년에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였던 것을 [[1982년]]에 '''7%'''로 줄여버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아예 3.5%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를 유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8.15 해방]] 이래 40여 년간 지속된 "高 인플레이션" 시대를 마감한다. 경제성장률 역시 80년에 -1.6% 였던 것을 1981년에 7.2%, 1983년에 13.4%로 올린 것을 기점으로, 이후 평균 10%대의 성장률을 기록한다.[* 세계 경제에 상당히 민감한 [[한국/경제]] 특성상 김재익 개인의 성과라고만 보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은 맞다. 게다가 초창기에는 세계 경제가 오히려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외 수입자유화 조치도 시작하고, 실제론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이뤄지긴 하지만 [[OECD]] 가입이나 [[금융실명제]] 추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흔히 정보화산업은 1990년대 이후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긴 하지만[* 당장 오늘날의 유명 IT 기업들도 90년대 중반 이후에나 대거 생겨난다.] 김재익이 이때부터 국내 전화 교환기 형식을 기존의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전면 교체해 훗날 전화망을 이용한 인터넷 회선 구축을 용이하게 하는 등 알게 모르게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 다만 전자식 교환기 도입은 당시 [[오명(정치인)|오명]] 체신부 장관의 의지로 시작된 사업이다.] 또 이 시기 그가 한 특별한 일 중에 하나가 [[부가가치세]] 도입이다. 이 도입과 관련하여 [[김종인]]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직접 [[서독]]을 답사하고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연이 되어, 당시 [[노총각]]이던 김종인 교수에게 중매를 서 주기도 했다. 허나 [[금융실명제]]처럼 지하경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정책을 시도하다가 전두환의 측근들한테 단단히 찍히는 아이러니를 초래하기도 한다.[* 특히 5공의 핵심 인사인 [[허화평]], [[허삼수]]에게 단단히 찍혔다. 정작 이 일 이후 허화평과 허삼수가 오히려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 이 둘이 대통령 친인척 공직자 금지 결의를 강하게 내세운 바람에 전두환에게 단단히 찍힌 때였기 때문.] 덕분에 전두환이 최종 승인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치인들의 비자금 조성에 크게 방해가 되자 측근들이 난리를 쳤고, 결국 측근들의 반발에 못 이긴 전두환이 생각을 바꾸면서 시행에는 실패했다. 물론 전두환이 최종 승인할 당시에도 진지한 고민을 했다기보단 당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하여 여론이 악화되고, 정권이 불안해지자 금융사기를 방지할 방법 중 하나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려했을 뿐이긴 했다. 그러다가 측근들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정치자금을 주고받지 못 하게 된다"는 식으로 설득하자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포기한 것. 그나마 시행 직전까지 간 것도 실은 전두환을 설득했던 측근들이 당시 전두환에게 밉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고집을 부린 면이 있었다. 하여튼 이렇게 금융실명제 개혁이 실패하면서, 김재익도 본인의 입지가 꽤 흔들리던 찰나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터지고 그렇게 김재익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