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재훈(농구) (문단 편집) === 고교-대학 시절 === 용산고 진학 후 양문의 감독 밑에서 배우며 2학년이던 1988년 전국 2관왕(춘계-대통령기), 3학년때인 1989년 전국 4관왕(춘계-대통령기-쌍용기-전국체전)에 오르며 고교농구를 석권한 용산고 전성기의 주전 센터로, 고교 시절의 활약 덕분에 연세대 1학년때 용산고 동창 [[김승기(농구)|김승기]]와 함께 1990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 선수권 대회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사상 최강이라던 당시 대표팀(G: [[김승기(농구)|김승기]], [[이상민(농구)|이상민]], [[홍사붕]], F: [[문경은]], [[조성원]], C: 김재훈, [[전희철]], [[서장훈]] 등)은 조별예선에서 전패를 당하며 광탈했다.] [[연세대학교]] 진학 후 [[최희암]] 감독 아래서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으로 출장하여 저학년 때는 주로 2년 선배 [[정재근(농구)|정재근]]과, 4학년 때는 신입생 [[서장훈]]과 더블 포스트를 형성했던, 당시 빅맨답지 않게 개인 기술이 좋은 [[센터(농구)|센터]] 겸 [[파워 포워드]]였다. 연세대 시절엔 선배 [[정재근(농구)|정재근]], [[오성식(농구)|오성식]], [[이상범(농구)|이상범]], 동기 [[문경은]] 및 후배 [[이상민(농구)|이상민]], [[우지원]], [[김훈(농구)|김훈]] 등 초호화 멤버들과 뛰면서 연세대를 실업팀들과 겨루는 [[농구대잔치]]에서 상위권에 오르도록 했고, 초특급 신입생 서장훈이 입학한 4학년 때는 이들과 함께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대학팀 사상 최초의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4학년때 초반까지만해도 서장훈과 함께 주전 4번으로 골밑을 지키던 김재훈은, 정작 농구대잔치 들어 서장훈 싱글 포스트 작전을 사용한 [[최희암]] 감독의 용병술 탓에 농구대잔치 내내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때 김재훈 대신 주전으로 나선 선수는 당시 2학년 슈터 [[김훈(농구)|김훈]]이었다.] 졸업 후 실업팀 [[전주 KCC 이지스|현대전자]]에 계약금 3억 원을 받고 스카우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