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정일/생애 (문단 편집) == 출생(1941/1942)과 아동기(1941/1942~1949) == [[김일성]]의 처 [[김정숙(북한)|김정숙]]은 보로실로프[* 현 [[우수리스크]].] 근처 야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다. 한때는 [[김정일]]이 비야츠코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베이징]]에 사는 전 유격대원 리재덕의 증언에 의해 힘입은 적이 있으나 1942년 4월 18일에 작성된 야영 대원 명부에서 김정숙의 이름이 발견되면서 비야츠코에 출생설은 수정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 [[정일봉|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유라'. [[러시아]]식 이름 [[유리#s-1.3]](Юрий)의 애칭이라고 한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이르세노비치'는 러시아식 이름에 있는 부칭(父稱)이다. 아버지 '일성'의 러시아식 표기는 '이르센'인데 여기에 남성 접미사 '-오비치'를 붙인 호칭이다.] 킴'이다. 이 '유라'라는 이름은 10대 시절 내내 사용했고, 남산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앞 둔 무렵인 1960년 여름, 졸업을 앞두고[* 북한에서는 신학기가 가을이라고 한다.] '이제 내 이름은 김유라가 아니라 김정일로 고쳤으니 앞으로 김정일로 불러달라' 고 급우들에게 선언했다고 한다. 한자도 처음에는 正一이라고 했다가 80년대에 다른 이복 형제들과 함께 사용하는 一자를 버리고 유일한 후계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일성]]의 한자와 맞춘 日자를 사용해 正日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전통 작명법에 따르면 뼈대있는 가문일수록 [[피휘|임금이나 자기 직계 조상의 이름자를 일부러 피하여 이름을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므로, 김정일과 김정은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자를 일부러 취해 쓰는 것은 전통 유교사상의 잣대로 보자면 그야말로 근본없는 [[개족보]] 가문의 행태이다.] [[파일:attachment/김정일/백두산밀영.jpg]]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북한이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 뒷산이 [[정일봉]]이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 어느 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 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 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 이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 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 인근 [[삼지연시]] [[듣보잡]]이었던 어느 산봉우리가 김정일의 '공식적인' 출생지가 되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생일이 1942년 2월 16일인데 정일봉이 봉우리만 따졌을 때 높이가 216.42m라 하늘에서 산 높이까지 생일에 딱 맞게 점지해 주었다며 김정일이 하늘에서 내린 인물이라는 증거라고 열심히 주민들에게 선전했다. 해방 후 부모와 함께 수송선 편으로 귀국해 일본인의 자택을 압류해 만든 [[평양]]의 수상관저에서 단란한 생활을 보냈지만 몇 년 뒤 자신의 남동생 김만일[* 러시아 이름으로 슈라]와 수상관저 연못에서 놀다가 김만일이 익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정일이 겁을 먹고 남동생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책망할 때마다 두고두고 이때의 일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만일이 죽은 지 한참 후(1954년)에 김일성은 [[김성애]]와의 사이에서 또다시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김평일]]로 지었다. [[KBS]]의 다큐멘터리 <대기획 김정일>에선 김정일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동생의 익사를 보고만 있었다고 하였고, 같은 방송의 다른 다큐멘터리 <김정일, 금지된 과거>에서는 아예 김정일이 동생이 익사하는 걸 방치하는 수준이 아니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걷어차서 자꾸만 물속에 처박았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못을 통째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일단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으론 김정일과 김만일이 놀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김만일이 물에 빠졌고[* 김정일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김일성의 당시 주치의의 아들인 세르게이 리는 "당시 유라(김정일)와 슈라(김만일) 둘만 거기 있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빠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놀란 김정일이 허겁지겁 아버지를 불러왔으며, 놀란 김일성이 다시 자신의 주치의를 불러왔지만 이미 김만일은 숨진 후였다는 것이다. 다만 5세, 3세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을 보호자 없이 방치했을 때 정말 기상천외한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누구든 알고 있다. 성인이 된 김정일이 어떤 인간이었든 간에, 5세밖에 안 된 아이가 의도적으로 동생을 살해했으리라고 무리해서 악마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아버지 김일성이 [[김성애]]와 일종의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북한)|김정숙]]을 멀리했고, 1949년에는 생모인 김정숙도 넷째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이후 계모로 맞이한 김성애와 그의 이복 형제들과 갈등을 겪었고 계모 김성애를 절대로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던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당당히 허락 받아 계모 김성애를 어머니 대신 "아주미(아주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심지어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식날 김성애가 참석하자 졸업식장을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졸업식이 며칠 연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생모와 남동생의 죽음, 계모와의 갈등을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김경희(1946)|김경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품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