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갑(1951) (문단 편집) === 공직 생활 === [[1975년]] 안동에서 보충역으로 근무하던 당시 [[행정고시]] 17회 합격으로 공직에 입문하여, 1978년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에서 대미 통상업무를 맡으며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한국의 칼라TV 수출과 관련해 [[미국]]의 통상압박이 심하던 때다. 대미 통상업무는 업무강도가 높고 고참이 많은 탓에 승진에서 불이익을 겪어 ‘사무관의 무덤’이라고 불렸는데 김종갑은 공직생활 초반 사무관 3년 8개월, 과장 2년 6개월 등 미국 통상관련 부서에서 내리 6년을 일했다. 결국 행정고시 동기 가운데 과장 승진이 가장 늦었으나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공부 내에서 대미 통상업무 전문가로 자리잡았다. [[1980년대]] 후반 상공부 통상협력담당관으로 일하며 미국과 벌였던 [[슈퍼 301조]] 관련 협상에서 한국의 입장을 끝까지 관철해 미국 통상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 뒤 [[통상산업부]] 통상협력국장, [[산업자원부]] 국제산업협력국장 등 미국 통상 관련 업무를 4차례나 다시 맡는 등 15년 동안 미국 통상업무를 담당하며 ‘미국 통상분야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행정고시 동기 가운데 과장 승진이 가장 늦었으나 국장 승진은 가장 빨랐다. 김종갑이 미국 통상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에는 그의 영어실력도 한몫했다. 김종갑은 외국인들로부터도 품위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독일에서 열린 국제행사를 영어로 진행하는 김종갑의 모습을 본 이기주 당시 독일대사가 “대한민국 공무원 중 저렇게 고급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극찬한 일화도 전해진다.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파견됐을 당시 [[산업자원부]]의 ‘간판급 국장’으로 ‘에이스’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 노무현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차관보, [[특허청장]], 산업자원부 제1차관 등을 지냈다. [[특허청장]] 시절 [[대한민국 특허청]]에 중앙부처 처음으로 ‘직무성과 계약제도’ ‘재택근무제도’ 등을 도입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고 직원들과 혁신 등을 주제로 격의 없는 토론을 진행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5년 동안 [[대한민국 국회|국회]]에 계류돼 있던 직무발명과 관련한 보상기준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특허청장]]을 지내며 부처별 성과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고 개인별 업무평가 점수도 높아 2006년 [[산업자원부]] 제1차관으로 승진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9&aid=0000127816|기사]] 노무현 정부에서 미국의 [[하이닉스반도체]] 상계관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국가 균형발전정책과 차세대 성장동력 육성정책, 산업집적화(클러스터) 개념도입 등 굵직한 산업정책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2007년]] [[2월 7일]], [[산업자원부]] 제1차관에서 퇴임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8&aid=0000749102|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