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규(1951) (문단 편집) == 생애 및 정치 경력 == 1951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전주영생고등학교]](11회), [[전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전주대학교 졸업 후 전주 전라중학교, 전주영생여자상업고등학교(현 [[전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하였다. 1990년대에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고명승]] 전 [[제3야전군사령관]]의 [[비서]]를 역임하였다. 한편 부안사랑나눔회 [[회장]], 전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집행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제1회 지방선거에선 민주자유당[* 국민의힘 전신. 한나라당이 리즈시절을 구가할때도 전라도 지역들 대부분 후보를 내는데도 부안군만큼은 김종규를 의식하여 후보를 내지 않았다.]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압살당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안군수]]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최규환(정치인)|최규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안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군수인 [[새천년민주당]] 최규환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이듬해 [[위도(부안)|위도]] 방사능폐기물처리장 건으로 [[부안사태|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 때 일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경찰 병력이 부안군을 전시 상태에 준할 정도로 통제하고 연일 반대 입장의 군민들이 집회를 열다가, [[http://news.donga.com/3/all/20030908/7980952/1|심지어 성난 군민들에 의해 김종규 군수가 집단 폭행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그 여파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안군수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2005년)|민주당]] [[이병학(1957)|이병학]] 후보에 밀려 패하였다. 이후 [[호원대학교]] 겸임교수,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전북사랑나눔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안군수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2008년)|민주당]] [[김호수]] 후보에 밀려 패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북도 부안군-[[고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통합당]] [[김춘진]][* 하필이면 김종규와 같은 '''부안 출신'''이었던 탓에 김종규는 이 선거에서 소지역주의 버프도 전혀 받지 못했다. 실제로 4년 뒤 치러진 [[20대 총선]]에서는 부안이 [[김제시]]와 합구되어 선거를 치렀는데, 김제([[김종회(1965)|김종회]]) vs 부안([[김춘진]])의 소지역주의 구도가 형성되어 두 후보 모두 각자 고향에서 몰표를 받았지만 두 고장의 인구수 차이 때문에 김제 측 김종회가 승리했던 전적이 있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부안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첫 당선 이후 무려 12년만에 재선에 성공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부안군수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더불어민주당 [[권익현(1961)|권익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복당을 신청하였으나 불허되었다.[* 원래는 보수정당 출신이긴 하지만 2014년 지방선거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예비후보로 활동했던터라 복당이다.] 복당이 불허되었음에도 [[이재명]] 대선후보 캠프에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재명 후보가 호남표 결집을 위해 대사면 요청을 건의하고, 이를 당 지도부가 수락하면서 [[2022년]] [[1월 16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022년]] [[5월 12일]], 해당(害黨)행위를 이유로 제명처분되었다. 자세하게는 민주당의 부안군수 선거 예비후보로 경선에 참여했으나 권익현 현 군수에게 패한 뒤 [[무소속]] 후보를 도왔다고 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220512155000055|#]] 하지만 권익현이 무난히 당선, 최초의 재선군수가 되었기에 김종규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만 증명되었다. 불명예 정계은퇴의 가능성만 높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