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훈(1972)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073/2008/10/16/20081017aa004.jpg|width=100%]]}}}|| 1994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 당시에는 나름 펀치력이 있고 대형 내야수로서의 자질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주전들이 대거 방위복무로 빠져 전력이 약해진 팀 사정 탓이 크긴 했지만, 신인임에도 개막전부터 선발 2루수 5번타자로 기용되었을 정도. 그러나 프로의 벽을 실감하며 겨우 35게임에 출장해 .191의 타율과 1홈런 9타점에 그치며 루키 시즌을 마쳤다. 이듬해인 1995년 백업으로 71경기에 출전했고, 1996년부터 준 주전급으로 도약해 89경기에서 .290의 타율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7년엔 매우 부진했고 결국 시즌 도중 투수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와 함께 [[박석진]], [[이동수(야구선수)|이동수]]를 상대로 유니폼을 바꿔 입으며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다. 그리고 은퇴할 때 까지 삼성에서 13년간 활약하면서 김종훈 하면 삼성 선수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탓에 [[롯데 자이언츠]]에서의 존재감은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롯데 시절 김종훈은 '''KBO 평균'''이라는 신문기사로 잠시 주목받기도 했다. 체격조건도 KBO 평균, 나이도 KBO 평균, 개인기록도 KBO 평균, 심지어 연봉도 KBO 평균. 그러나 삼성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가을의 사나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규시즌은 그냥저냥 평범했어도 포스트시즌만 들어가면 미친듯한 활약을 보인 것. 예를 들면 [[KBO 플레이오프/1999년|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참조)과 [[2004년 한국시리즈]] 3차전과 8차전, [[2005년 한국시리즈]] 2차전. 본인도 이 경기들이 매우 기억에 남는 듯. 잠시 연수하던 도중 귀국해 [[KBO 플레이오프/2008년|2008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는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평범했던 선수가 갑자기 가을에 들어서면 미친 듯이 펄펄 날 뛴 듯. 의외로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에게 강했다. 의외로 큰 경기에 강한 선수이다 보니 포스트시즌 통산 타율이 0.285에 총 34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타점의 경우 22타점을 올려 [[이만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이만수]]와 함께 2011년까지 한국시리즈 통산 타점 역대 1위였다. 그 당시 현역 중 1위인 [[박한이]]가 18타점이었기 때문에 의외로 깨지기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2013년에 박한이가 25타점으로 한국시리즈 통산 타점 역대 1위에 등극했다. 팀 내에서는 [[김한수]]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가을야구 쌍두마차를 이끌기도 했다.(실제로 김한수에 비해 나이가 1살 더 젊지만 빠른 생일이라 사실상 동갑내기다. 얼굴은 통통한 편.) 삼종훈 삼총사 중 막내이기도 하다.([[박종훈(1959)|박종훈]]은 1959년생, [[장종훈]]은 1968년, 김종훈은 1972년) 또한 데뷔년도도 늦은 편이며 가장 늦게 은퇴했다.(박종훈 - 1983년~1989년, [[장종훈]] - 1986년(연습생)~2005년, 김종훈 - 1994년~2007년) 삼종훈 삼총사 중 선수 시절에서는 우승 경력이 많다.(3개) 이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있었던 3번의 우승을 경험했기 때문.(사실 [[이승엽]], [[마해영]], [[양준혁]], [[진갑용]] 등등 동료들의 힘이 컸다... 이건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한때는 [[강동우]], [[박한이]]와 함께 [[로나쌩 클럽]]의 타선을 맡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