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주원(신라) (문단 편집) == 생애 == 본래 중대 신라 왕위는 무열왕계가 계승하다가, [[혜공왕]]과 그 일가가 김지정의 난으로 몰살당하면서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다만 선덕왕은 모계로 무열왕의 혈통을 잇고 있었고, 이후 하대 왕들과도 혈통이 따로 놀기 때문에 과도기적 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무열왕계와 원성왕 이후의 신라 왕들은 무열왕부터 이미 갈라졌지만, 선덕왕은 [[성덕왕]] 때 갈라졌다. 선덕왕도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 뒤를 먼 왕족 중에서 찾아야 했는데, 애초 혜공왕과 같은 무열왕계인 김주원은 본디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선덕왕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권자였고, 선덕왕이 죽자 귀족들은 김주원을 불러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침 그 날 [[금성]]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났다. 김주원의 집에서 궁에 가려면 알천(현재는 북천이라 부른다)이란 강을 건너야 했는데, 물이 불어버린 바람에 며칠동안 알천을 건너지 못해 [[화백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뒤늦게 홍수가 잦아들고 나서 왕궁에 가보니, 그 사이에 왕위는 내물왕계인 정적 [[상대등]] 김경신이 집어삼켜 원성왕으로 즉위한 이후였다. 옛날에는 왕도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며, 자연재해 때문에 즉위식에 가지 못한다면 하늘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부여]]에선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물어서 왕을 죽였다고 하고 [[조선]]에서도 큰문제가 생기면 왕이 덕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선덕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후에 왕의 족자(族子, 친족) 주원(周元)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때 주원은 수도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경신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 >《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09&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10권 신라본기 제10 원성왕]] 그러나 기록상의 계절은 정월 13일, 양력 2~3월인데 이 계절은 [[태풍]]도 없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가장 건조한 시기라 홍수가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김주원이 홍수 때문에 왕위를 포기했다는 것도 납득되지 않는 설명이다. 학자들은 김주원의 정적이었던 김경신이 먼저 자신의 지지세력과 함께 궁을 점령,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여 김주원의 세력을 약화시켰기에 김주원이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김경신은 즉위해서 원성왕이 된다. 김주원이 명주로 일가를 이끌고 갈 때 그 행렬이 아주 크고 성대해 볼 만했다고 한다. 왕위를 다투던 최고 귀족 가문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이주하던 중 어떤 산에 머물렀는데 그 산이 지금의 주왕산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주왕산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고려]]의 군사를 막기 위해 주왕산성을 쌓았다는 전승도 있다. [[http://folkency.nfm.go.kr/main/dicParser.jsp?DIC_ID=7011&xslUrl=dicPrint_Pop.jsp&printYN=Y|#]] 다만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났음에도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아들들은 수도 금성의 정계에 계속 남았다. 첫째 김종기는 [[시중]]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둘째 [[김헌창]]이 [[김헌창의 난]]을 일으키고 그 아들 [[김범문]]의 난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무열왕계는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족강일등). 이는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따른 것인데, 정작 사서에서 김주원의 후손인 김흔과 김양은 이후에서 진골의 직위를 차지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낭혜화상은 [[태종 무열왕]]의 후손은 맞지만 김인문의 후손은 아닌데 이를 보면 [[김문왕]], 김노차, [[김인태]], 김지경, [[김개원]] 중 하나를 조상으로 두는 것으로 보이고 이들이 족강될 때 김주원 일파는 숙청 기류에서 피해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첫째 김종기의 후손은 김종기의 손자로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우고 [[문성왕]] 대 권신으로 자리매김했던 [[김양]] 및 그의 사촌인 [[김흔]] 때 대가 끊겼고 둘째 김헌창의 후손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반란으로 그 아들인 김범문 때 멸족된다. 다만 김주원 본인 및 나머지 일가는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웅천주([[웅주]])와는 완전히 국토 반대편인 하서주(명주)에 있었고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달리 처벌받지는 않았다. [[후삼국시대]] [[명주]]의 호족이었던 [[김예]](金乂)가 그의 후손이다. 김예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 공을 세워 [[사성정책|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예가 되었다.]] 단 고려에서 왕씨를 사성받은 사람들은 고려 멸망 이후 조선에서 본래 성 강릉 김씨로 복성했다. 초기 조선은 [[왕씨 몰살|왕씨를 숙청했는데]] 실제 왕씨가 아닌 사성 왕씨까지 그럴 필요는 당연히 없었기 때문. 한편 김예 이외에 [[궁예]]를 지지했던 명주의 호족 [[왕순식]]이 김주원 후손이라고 [[태조 왕건]] 드라마를 비롯한 여러 매체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식이 김주원의 후손이라는 당시 기록은 없다. [[고려]] 대에 [[왕건]]에게 [[신뢰]]의 증표로 [[개성 왕씨]]를 하사받아([[사성정책]]) 왕순식으로 개명했던 것인데 명주의 호족이라는 점과 원래 왕씨가 아니었다는 점, 위의 김예와 같은 명주 지방 호족이었기 때문에 김주원의 후손이지 않았겠냐는 의심이 있으나 사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김주원의 셋째 아들의 후손이라는 서술은 일단 셋째 아들의 존재부터가 정식 사서와 교차검증되지 않은 정보이다. [[강릉시]] 성산에 명주군왕릉이 있다. [[분류:신라의 왕족]][[분류:신라의 상대등]][[분류:강릉 김씨]][[분류:몰년 미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