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중건 (문단 편집) === 원종교 창시 === 1910년 봄, 김중건은 '천기대경(天機大經)'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동학의 근본사상인 시천주(侍天主)를 부정하고 사람이 곧 하늘의 주인이라는 시인주(侍人主)를 내세웠다. 그리고 난국을 타개할 방책으로 대공화무국(大共和無國)을 주장했다. 대공화무국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은 자연의 소박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대공화를 거쳐 무국을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에서 이를 이루려면 자주 독립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김중건은 1910년 9월부터 1912년 4월까지 총 10편의 글을 <천도교월보>에 게재해 자신의 사상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는 천도교의 사상을 재정립한 자신의 철학인 극원철학[* 유교, 도교, 불교에 기독교 이론을 포함하여 종합한 우주론]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사회를 개혁해 나가고자 했다. 1911년 5월, 그는 천도교 영흥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자신의 철학을 토대로 한 천도교 교단 개혁에 몰두했다. 먼저 그는 김교운(金敎運), 이두섭(李斗燮), 김택후(金澤厚) 등 영흥 지역의 젊은 천도교 신자 17명과 함께 비밀결사 '21 결의단'을 조직했고, 서울의 '천도교청년강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개혁의 필요성과 개혁 방법을 강의했다. 이러한 김중건의 행보에 반감을 품은 천도교 본부는 1912년 1월 그를 교구장에서 해임시키고 뒤이어 출교시켰다.[* 천도교 측에서는 김중건이 영흥군 교인 주창원과 모의하여 공금을 횡령해서 출교시켰다고 주장한다.] 김중건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21결의단을 확대시켜 '천도교신인회'라는 개혁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함경도 일대의 천도교인들을 포섭했다. 그러나 천도교가 신자들에게 이단인 그를 따르지 말것을 통보해 신자 확보가 용이하지 않자, 그는 1912년 구이봉(九而峰) 산실(山室)에 들어가 <천기대경(天機大經)>과 <대종원부경(大宗元符經)>을 완성하여 극원철학을 종교화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913년 1월 1일을 기해 건원(建元)을 선포하고 원종교(元倧敎)를 창시했다. 김중건이 창시한 원종교는 봉건적 전제정치제도, 사회경제 구조, 신분제, 가렴주구 등을 부정하고 새 질서, 새 사회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그의 사상은 무단통치 하의 모든 정치, 사회적 억압을 타파하고 사회를 개조하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압박, 피압박의 민족전 모순의 불합리한 현상이 제거되어야만 국가 또는 민족 단위의 소공화의 이상사회 건설이 가능하다고 봤으며, 무국의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한국의 자주독립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이를 위해 인물 양성이 중요하며 원종주의자들을 육성해 이러한 이념을 널리 전파시킨다면 독립운동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중건은 고향인 연동에서 첫 법회를 열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전법회(傳法會)라 칭하고 함경도, 평안도, 경성을 돌며 전법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전법 활동은 그리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일제가 1911년 '종교취체'를 발표해 종교행위도 치안의 문제로 규정하고 한국 신종교가 정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규제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방해로 더이상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4년 봄, 원종 신도 윤인중(尹仁中)․김전(金田) 등과 같이 연해주와 맞닿아 있는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로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