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중건 (문단 편집) === 거듭된 시련 === 김중건은 1921년 1월경 원종교도들을 이끌고 또다시 안도현 도전동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동안 미뤗던 다복식 정책을 실현시키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청년 독립군을 총망라한 교육을 실시해 이들을 흡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중건이 장백산맥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집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유행병이 돌아 많은 원종교도들이 병사하면서 원종교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 이에 김중건은 1921년 가을 북간도 화룡현 삼도구 원화동(元化洞)으로 이동했다. 원화동은 1910년대 함경북도 명천에서 이주한 한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1920년대에는 삼도구가 번영하면서 교통의 요지로 변했다. 김중건은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원종교를 전파하기로 했다. 김중건은 총사의 교단조직 체계를 정비하여 의회 역할을 하는 대종원, 종리사, 보성사, 학무사, 공무사 등을 두고 그 아래 내무, 외무, 재무, 학무 등 4개 위원회와 위생원, 대정원 등을 신설했다. 또한 지방법회에는 주무, 학무, 외무, 재무 등을 두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교육 사업과 지방 법회조직의 육성에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21~1922년 사이에 내수동(內水洞) 등 5개 지역에 지방 법회를 설치해 총 13개 법회를 수립했다. 또한 김중건은 가능한 한 소규모의 학교라도 세우고자 노력했고, 그결과 26개교가 신설되었다. 그는 학교를 통해 원종교를 전파하고 충실한 교인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교재를 편찬하고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민족의 역사, 어문, 지리, 음악 등을 가르치면서 항일 정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학교마다 기숙사를 두어 집단적 생활을 통해 학생들의 조직력을 키우고 황무지를 개간토록 해 교육과 생산노동을 병행했다. 그는 또 원화동에서 대한국민단 간도지방 지단장을 맡아 각지에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안도현에 교인들을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1921년 12월 안도현에 파견된 청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그의 이같은 활동이 탄로났다. 결국 일본 영사관이 파견한 경찰들의 습격으로 삼도구에 있던 김중건과 교도 김준, 김현묵, 홍참봉 등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22년 초, 김중건은 만몽조약에 따라 용정총영사관에서 3년간 중국 재류금지 명령을 받고 고향인 연동으로 강제 추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