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지섭 (문단 편집) == 생애 == 1884년 7월 21일 [[경상도]] [[안동시|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아버지 김병규(金秉奎)와 어머니 [[강(성씨)|신천 강씨]](信川 康氏) 강극주(康極周)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김병두(金秉斗)[* 김병두(金秉斗)는 족보상으로는 아버지 김병규의 6촌 형으로 재종숙(再從叔)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래 김병규는 김병두의 친동생으로, 5촌 아저씨 되는 김낙구(金洛九)에게 입양된 것으로 본래는 김지섭에게 큰아버지가 되는 것이 맞다.]에게 입양되었다. 젊어서 [[일본어]]를 1달 만에 익혀 상주공립보통학교(현 상주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독학으로 [[금산군|금산]]지방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 채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하여 [[베이징시|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이 때 의열단원에게 "일제가 보낸 [[첩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1년경 단장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본 제국|일제]] 주요 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시|상하이]]로 피신했다.[*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0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98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1921년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김지섭은 국내에 있을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 경정2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광역시)|중구]] [[종로2가(대구)|종로2가]])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921년 8월 26일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소재 불명으로 부친 촉탁이 반려되었으므로 1921년 8월 이전에 이미 [[중국]]으로 피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지린성|길림성]] 괴천점 객잔(客棧)에 머물렀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09&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28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이후 의열단은 [[도쿄시|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 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에 보냈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경로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았다.[* [[아편]]과 [[코카인]]을 밀수하는 일본인으로 가장했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 운반선 '텐죠야마마루(天上山丸)'를 통해 1923년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여 12월 31일 일본 [[후쿠오카현]] 야와타 제철소에 도착했다. 10일 동안 배 밑의 창고에서 지내며 하루에 [[주먹밥]] 1~2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 데다가 자금마저 녹록치 않아 [[교토시|교토]] 야와타시(市) 여관에서 1월 3일까지 머무르다가 도쿄로 출발했다. 그러나 도쿄로 출발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제국 의회'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 밀항인 신분인 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 의회'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고쿄|황거(천황의 궁성)]]로 바꾼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 대지진/일본군의 학살|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고 격노하여 의거를 결심했다고 한다. 1924년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천황이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二重橋, 이중교)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의 창고에서 숨어 있었다.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10일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에 습기가 스미어 불발탄이 났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나머지 2개는 안전핀도 안 뽑고 던졌다고 한다.][* 자료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는 어떻게 [[한인애국단]] 제1호가 되었는가」의 저자 배경식이 기재한 당시 자료에 따르면 불발되었다고 알려진 [[수류탄]] 중에 안전핀을 뽑지도 않고 던진 것도 있다고 한다.(해당 각주는 5번 각주에서 안 터진 수류탄이 습기를 먹은 탓이라고 서술되어 있을 때에 작성되었다)]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체포된다. 이후 검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으며 [[후세 다쓰지]]가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고 하는데 그는 "김지섭은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1927년 10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1928년 2월 22일 옥중에서 뇌일혈에 걸려 45세로 [[순국]]했다. 아래는 독립운동가 김지섭 의사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순국하기 전에 쓴 [[시]]이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 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촉도(蜀道, 중국 사천성 촉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보다 험하고 태나라보다 더욱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김지섭의 묘소는 처음에는 일제가 화장해버린 유골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매장했다가 이후 이장해서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 있었다. 현재 이 묘는 예천청주정씨재실(유형문화재 제315호), 대지재사(유형문화재 제173호)와 함께 '감자'라는 [[프로젝트]]에 의해 보존되고 있었다가 2004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으로 유해가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