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지태 (문단 편집) === 김지태 독립운동 조작 의혹 === 2004년에 김지태의 유족들은 김지태가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의 "부산지부 간부직을 맡았다가 부산경찰서에 구속까지 됐다"고 말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253368|#]]. 그러나 조선청년총동맹은 1924년 220여개의 사회주의 계통 청년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로 1925년 일제의 의해 와해되었으며, 유족들이 주장하는 시기에 김지태의 나이는 불과 17-18세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청년총동맹을 이끌었던 [[김사국]], [[최창익]], [[이영]] 등은 각각 1895년생, 1896년생, 1889년생으로 모두 1908년생인 김지태보다 10살 이상 많았다. 더욱이 김지태의 유족들은 김지태가 1927~31년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간부를 역임하였고, 한글학교에서 야학을 가르쳤다고 주장하였다.[[https://www.yna.co.kr/view/AKR20191030071951004|#]] 그러나 이 시기는 김지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일하고 있을 때였다(김지태는 1927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하여 1932년 폐결핵으로 퇴사하였다). 일제의 대표적인 수탈 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일하며 독립운동단체의 간부를 역임했다는 논리도 말이 안되거니와 당시 그가 20~24세의 나이에 쟁쟁한 사회주의자들을 제치고 거대 사회단체의 간부가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당시 [[신간회]]의 주요 구성원은 [[안재홍]], [[이상재]], [[김병로]], [[오화영]], [[홍명희]], [[허헌]] 등 김지태의 아버지뻘 이상 되는 세대들이었다.[* 더구나 김지태는 교장의 추천을 받고 동척에 입사했다. 사회주의 단체 간부까지 된 사람을 공립학교 교장이 추천했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된다.] 이렇게 개연성이 떨어지는 주장들은 유족들의 유서 조작 의혹과 맞물려 김지태에 대한 친일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김지태와 동명이인인 항일운동가 김지태(1911-1937)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에서 일하다 투옥되었다는 사실만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다.[[http://w3devlabs.net/korea/archives/tag/%EA%B9%80%EC%A7%80%ED%83%9C|#]]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