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지태 (문단 편집) === 옹호와 반박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의 일생에 대한 평가에 조심스러움을 요구하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도 일부 친일파들은 기재되지 않는 등 완벽하다고 할 수 없기에 절대적인 기준으로 둘 순 없다. '''첫째''' 식민지시절 김지태는 부산공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 교장의 소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했다면 불과 20대 초반에서 5년 뒤에 퇴사했을 시기조차 20대 중후반 정도 밖에 안된다. 본인의 회고록에서도 확실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 자세한 내막을 모르지만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도 젊은 나이에 친일을 해서 아무나 토지 2만평을 받았다면 너도나도 친일을 했을 거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대학을 대신하던 최고 교육기관이 고등학교였다. 지금과 같이 30~40대가 아닌, 20~30대가 사회 주축인 시대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5년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했을 때 민간 경력으로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는 동시대 인물들의 이력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 둘째'''는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군부 쿠데타로 인한 정권이였고 당시 반대하던 세력과 인물들을 누명을 씌웠던 과거 사례들을 살펴본다면 당시 저 부정 사례도 곧이곧대로 신뢰하기도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당시 눈 밖에 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죄를 만들어서라도 정치적 이익을 보는 시대였다. [[인혁당 사건]] 부터 장기독재를 위해 [[10월 유신]] 까지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정권을 유지시켰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여야 한다는 이야기지만, 김지태의 여러 친일, 비리 의혹과 정치, 공안사건과는 결이 엄연히 다르다. 특히, 이승만-박정희까지 이어진 동척 근무 친일 의혹과 조세포탈 등의 여러 혐의는 상술한대로 엄연한 기록이고, 사실이다. '''셋째'''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조차 된 적이 없다는 데에서 앞으로 명백한 물증이 나오지 않는 한 친일파라고 규정하기란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 부정부패 의혹도 최근 재판결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의해 재산을 강압적으로 빼앗겼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김지태의 여러 혐의가 이승만 정권부터 장면, 박정희 정부까지 이어졌다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론하지만, 박정희 이전, 1960년 4.19 당시에도 김지태에 대한 시위대의 구호는 "친일 부정축재자"였다. 한마디로 김지태의 의혹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꾸준히 지속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김지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5년간 근무한 뒤 당시에도 매우 파격적인 특혜에 해당하는 2만평의 땅을 불하받았으며, 이 땅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사업을 번창시켰고, 1937년부터는 일제를 위한 군수사업을 했다는 이력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또 김지태의 부정축재 역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더욱이 정수장학회 문제 역시 '완전한 강탈'은 아니라고 결론이 나면서 억울하다는 일부 의견은 상당히 희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