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지태 (문단 편집) == 박정희 정부와의 유착 의혹 == 김지태 유족들은 그동안 박정희 정부 시기 내내 부일장학회 재산을 빼앗기는 등 자신들이 핍박받는‘희생자’의 위치에 있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가령 2012년 김지태의 26살 연하 아내 송혜영은 미디어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62년에 박정희 정권이 '밀수죄'라고 했었던 다이아몬드 반지와 외제 카메라를 다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했다고 말했다. 또 2012년 시점에서도 병원비도 없고, 택시 탈 돈도 없어서, 65세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무료 지하철 표를 이용하며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연봉만 20억 받는 (?) 당시 박근혜 의원과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비교하기도 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519|#]] 그런데 당시 7캐럿짜리 다이아몬드는 현재 시가로 약 10억이 넘는 고가품이다. 만약 정말로 송혜영이 고가의 밀수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면 생계에 어려움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7캐럿은 김지태 측의 주장이고,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의 그 당시 수사를 책임 지휘했던 사람은 10캐럿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김지태가 1960~70년대 내내 국내 10대 재벌로 승승장구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또 김지태 회사의 전성기 역시 1960~70년대였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050100209202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05-01&officeId=00020&pageNo=2&printNo=14322&publishType=00020|#]], 박정희 정부 시절 생활고로 고생했다는 송혜영의 주장은 근거를 잃는다. 김지태는 1968년에는 국내에서 이병철 다음으로 출자 기업체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인으로 보도된 적도 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050100239102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8-05-01&officeId=00023&pageNo=2&printNo=14472&publishType=00010|#]] 김지태는 1962년 박정희 정부에게 반강제적으로 부일장학회 재산 및 토지를 상납한 이후 오히려 정권과 유착하여 사업이 더 번창하게 되었다고 의심해볼 수 있다. 정수장학회 측은 김지태 유족의 소송과 관련하여 “김 씨는 1962년 재산 헌납 이후 정부로부터 해외차관, 은행차입 등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으며[[https://www.dailian.co.kr/news/view/311422|#]], 전직 중앙정보부 고위 관료 역시 비슷한 취지의 증언을 한 바 있다. "5·16 이후 당시로는 조달받기 어려운 차관 1800만 달러를 융자받는 등 (김지태는) 혁명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어요. 특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사나 신발 등을 육성해서 엄청나게 부자가 됐고 해마다 수출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박정희 정권 이후 자식들이 기업을 잘못 운영해 결국 부도가 난 겁니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11100018|#]] 실제로 김지태는 1962년 이후 꾸준히 회사를 발전시켜 1968년에는 박정희 정부로부터 석탄산업훈장을, 1969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1970년에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113000239102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8-11-30&officeId=00023&pageNo=2&printNo=14655&publishType=00010|#]][[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120900099202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9-12-09&officeId=00009&pageNo=2&printNo=1153&publishType=00020|#]][* 1970년 11월 박정희는 20여 명의 기업인에게 산업훈장을 수여했는데, 김지태는 이 때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진그룹 전신인 한진상사의 조중훈 대표가 최고상, LG그룹 전신인 반도상사의 구자경 사장이 동탑, 대우그룹 창설자인 대우실업의 김우중 사장이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6년 뒤인 1977년 한국은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고, 그해 수출의 날 행사에서 김지태는 1억5000만 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파일:external/ph.sisain.co.kr/13806_28152_1344.jpg]] 위 사진은 김지태가 1976년 1월 펴낸 그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 첨부 된 사진으로,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 찍은 것이다. 김지태의 자서전에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성업백세(盛業百世)’라는 휘호도 나오는데, ‘일구육팔년 오월 대통령 박정희’ 옆에 낙관이 찍혀 있고, 우측 상단에 ‘위김지태사장(爲金智泰社長)’이라고 적혀 있다.[[http://monthly.chosun.com/upload/1211/1211_158_6.jpg|#]] 김지태가 박정희를 증오했다면 과연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나 친필 휘호를 본인의 회고록에 첨부할 수 있었을까? 1973년, 김지태는 [[동방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회사가 휘청거릴 때는 박정희 정부로부터 거액의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6010009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6-01&officeId=00009&pageNo=1&printNo=4071&publishType=00020|#]] 만약 박정희 정부가 김지태를 핍박하기만 했다면 이런 일들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또 김지태가 박정희 정부 시기 자신의 2세들에게 정상적으로 회사 경영권을 넘겨주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52900239104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0-05-29&officeId=00023&pageNo=4&printNo=15114&publishType=00010|#]] 이렇다 보니 군사정권이 그의 뒤를 봐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지태는 사업을 확장해야 하고, 박정희는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으니 각자의 필요에 따라 조심스럽게 관계를 유지하는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맺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