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진영(1935) (문단 편집) == 지도자 시절 == 현역 은퇴 후 66년 해병대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하였고 69년 팀을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백호기 전국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및 [[한국실업야구|실업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 성공가도를 달린다. 8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감독,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코치, [[중앙대학교 야구부|중앙대]] 감독을 지냈고, 79년 고교제일의 투수 [[최계훈]] 스카웃 파동으로 [[중앙대학교 야구부|중앙대]] 감독을 사임했다.[* 최계훈은 [[인하대학교 야구부|인하대]]로 진학] 80년 12월 인하대 감독에 부임하여 81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 82년 백호기 전국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애초 [[인천광역시|인천]] 야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인천광역시|인천]]을 연고로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독을 맡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작 삼미나 [[한국야구위원회|프로야구 추진위원회]]에서는 김진영에게 아무런 접촉이나 연락이 없었다.[* 삼미의 구단주이던 김현철 회장은 김진영보다 [[박현식]]을 선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회장님의 의중'''이 우선시되었지만, [[박현식]]은 불과 11게임만에 3승 8패라는 기록만 남기고 총감독으로 물러나며 역대 최단명 감독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뒤늦게 프로추진위의 [[이용일]][* [[서울대학교]] 상대 야구선수 출신으로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사실상 한국프로야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인물이다.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을 역임했고, 전북 지역에 초/중/고 야구부를 여럿 창설하는 등 야구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10구단 창단 시에 전북 야구의 대부로서 10구단 유치 활동의 중심에 나선 바 있다.]이 김진영에게 삼미의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의했지만 감정이 상한 김진영은 "학교([[인하대학교]])를 대학야구 정상에 한번 더 올리고 생각해 보겠다" 라면서 완곡하게 거절해 버렸다. 일설에는 원년 삼미의 전력이 거의 [[능지처참]] 수준이라 일부러 감독직 제의를 외면했다... 란 얘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카더라]] 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