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진영(1935) (문단 편집) ===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시절 === || [[파일:장명부 & 김진영.jpg|width=100%]] || |||| {{{#b21528 '''장명부와 함께'''}}} || 그러나 [[1983년]]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전의 감정은 다 털고 시즌을 준비하였다. 김진영 자신의 성격은 상당히 호쾌한 용장 타입이었지만, [[장명부|단 한 명의 선수]]에게는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고, 이게 그의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잉태할 줄은 몰랐다. 바로 '''[[장명부]]'''. 1시즌에 '''427이닝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말도 안 되는 괴력을 발휘한 [[장명부]]에 의존해 1983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그에게 투수 운용까지 끌려다니면서 결국 [[1984년]]부터 시즌을 망치게 된다. 문제는 당시 삼미의 1선발 [[장명부]]와 2선발 [[임호균]]의 사이가 너무 안좋았고, 게다가 [[장명부]]는 배터리를 이루던 포수 [[김진우(1958)|김진우]]와도 [[견원지간]]이었다. 결국 [[임호균]]을 [[롯데 자이언츠]]의 [[김정수(1953)|김정수]], [[우경하]], [[권두조]][* 2012시즌 롯데 수석코치 하던 그분], [[박정후]]와 1-4 트레이드로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하면서 안그래도 얆은 투수진이 정말 [[장명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뭐 일단 이 얘기는 1984년부터의 얘기이고... 아무튼 [[장명부]]를 앞세워 전기 리그 1위를 달리며 "작년의 그 삼미 맞나?" 라고 할 정도로 야구팬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중, 2위 해태가 1.5게임차로 바짝 따라붙은 1983년 6월 1일 [[MBC 청룡]]과의 잠실 원정 경기 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0-1로 뒤진 8회초, 2사 만루의 찬스에서 [[최홍석(야구)|최홍석]]이 좌전 적시타를 날리며 주자 2명을 홈으로 불러들였는데 정작 주심은 2루 주자 이선웅의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1루 주자인 [[김진우(1958)|김진우]]가 3루까지 뛰다 태그아웃 된것이 2루 주자의 득점보다 빨랐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진영이 득달같이 주심에게 달려가 거세게 항의했지만 판정이 뒤집힐 리는 없었다. 뚜껑이 열린 김진영은 머리로 주심의 배를 들이받고 유니폼 상의를 풀어헤친 채 폭언을 퍼붓다가[* 김진영이 이날 지나치게 화를 낸 것은 다름아닌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전날(5월 31일) 경기 때 6회말 [[이광은]]을 상대로 2-2 상황에서 [[장명부]]가 던진 공은 누가 봐도 스트라이크 였지만 주심은 볼을 선언했고, 다음 투구 때 1타점 2루타를 맞으며 패배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사건 당일 4회초에도 김진우가 2-3 풀카운트 때 휘두른 배트에 공이 스치듯 맞고 뒤로 빠졌지만, 주심은 헛스윙 삼진 판정... 이래저래 쌓인 것이 많았던 김진영이었고 끝내 8회초에 사단이 난 것이다.] 급기야 백스톱 그물 뒤에서 경기 속개를 종용하는 이기역 심판위원장의 넥타이를 잡아 끌다가 드롭킥을 선사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그 옆차기는 이기역에게 맞지 않았고 정작 김진영 자신은 그물에 스파이크가 걸리며 땅바닥에 고꾸라졌다...다만 그전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감독관 양복이 찢어졌다.] 결국 김진영은 퇴장당했고 그날 경기는 [[이종도]]의 끝내기 안타로 삼미의 1-2 패배(...). 그런데 얘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다행이었겠지만, 하필이면 이 날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던 그 경기를 [[높으신 분들|어느 높으신 분]][* [[전두환|머리가 빛나는 양반]]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관련 기사들은 이를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분명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이 시청하고 있었다. 김진영이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보자 그는 '''"야구장에서 저래도 되는 건가?"'''라고 혀를 끌끌 찼을 뿐인데, [[과잉 충성|그 밑에 있던 인물들이 알아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린이에게 꿈을 주는 야구장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정의사회구현에 역행하는 일"''' 이라는 명목 하에 무언가 지시를 하달하였고, 김진영은 다음 날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원정경기가 끝난 뒤 후 폭력 혐의로 쇠고랑을 차며 졸지에 구속기소당하고 말았다. [[https://youtu.be/IQSBtGek_Z8?t=827|문제의 순간.]] 이날 김진영의 난동은 1982년 12월 17일 대통령배 전국 농구대회 [[한국은행]] 대 [[IBK기업은행|기업은행]] 경기 도중, 한국은행 소속 '''윤진구'''가 기업은행 '''임기열'''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여 폭행죄로 구속기소 된 이후 불과 반 년 남짓만에 터진 사건으로 당시 스포츠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일주일 만에 벌금 100만원으로 약식기소 되며 석방되었지만, 구단으로부터 그해 잔여경기는 자숙하라는 의미로 감독직에서 일시 퇴진당했고, 이재환 코치와 [[박현식]] 총감독이 대행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결국 김진영은 덕아웃 밖에서 삼미가 간발의 차로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전기리그는 해태에게 극적으로 역전당하고, 후기리그는 MBC에게 밀려서 전후기 2위, 통합 3위의 성적이었다. 그해 시즌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에서 감독 제의가 있었지만 "나는 [[인천광역시|인천]]야구를 버릴 수 없다" 면서 거절하기도 했다.[* 1983년 시즌 중 [[서영무]] 감독을 내치고 [[이충남]] 조감독(코치도 감독도 아닌...)의 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친 삼성의 당시 후임감독 후보는 김진영 말고도 OB 코치였던 [[김성근]],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 [[배성서]] 등이었는데 결국 OB의 창단 감독이던 [[김영덕]]으로 낙점. 이 과정에서 [[김영덕]]과 [[김성근]]의 사이가 완전 틀어지게 된다.] [[1984년]] 다시 현장에 복귀했으나 이미 [[장명부]]의 부진[* 지난해 시즌 전 30승=보너스 1억원을 내건 삼미 사장의 약속이 공수표로 돌아가며(사장 사비로 일부 금액을 챙기긴 했지만) 단단히 심기가 상한 상태였다. 한편으로 [[일본]]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장명부]]의 허리상태가 전해의 혹사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설령 정상적인 마인드로 출장했다 하더라도 좋은 성적은 내려야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이 심해졌고, 팀 전력도 자연스레 '''원상복귀''' 되면서[* 본질적으로 전해의 돌풍은 거의 [[장명부]]의 초인적인 30승 원맨쇼 덕분이었고, 그나마 12승으로 마운드를 받쳐주던 [[임호균]]마저 [[롯데 자이언츠]]로 보내 버린데다 구단에서 [[장명부]](의 실력과 투수조련 능력)만 믿고 마운드 보강은 거의 하지 않았다.] 1984년 전,후기 내내 꼴찌를 기록. 그리고 1985년 전기리그는 아직도 시즌 최다 연패기록인 18연패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기며 또 꼴찌(...).[* 그뿐인가. 에이스로 믿노라 하던 [[장명부]]는 그 해 무려 25패라는 시즌 투수 최다패 기록을 작성했다(...).][* ~~다행히~~ 이 기록은 [[2020년]] [[6월 12일]] [[한화 이글스]]에 의해 단독기록이 아닌 타이기록이 되었다.] 결국 구단에서는 18연패의 책임을 물어 김진영을 해임하려고 했다. 1985년 전기리그 종료 후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인해 삼미 구단은 청보에 매각되면서 [[청보 핀토스]]로 새 출발을 했고, 어쩌다보니 모기업이 바뀌면서 김진영의 해임도 없던 일이 된다. 후기리그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4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1986년 참신한 새 감독이 필요하다는 구단의 판단 하에 김진영은 감독에서 해임된다. 김진영의 뒤를 이어 1986년부터 청보 구단의 지휘봉을 맡았던 사람은 [[허구연|훗날 KBO 총재가 되는 돔성애자]]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