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진영(군인) (문단 편집) ===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야권과 국민들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심판 요구에 대한 [[노태우 정부]]의 유화적 스탠스[* 노태우는 자신들을 전두환 정권과 차별화하려 했고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과 전두환의 세력들을 숙청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심판 분위기가 확대되는 것을 사실상 방관했다.]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야권의 심판 요구를 좌시하지는 않겠다는 군 내 [[강경파]] 장성의 위협 발언[* 좌천된 일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역대급인 민병돈만큼은 아니어도 강직한 성격이었다. 논란이 되었던 발언은 "야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추궁을 고집하면 그들이 공약한 정치 보복 배제에 위배된다. 그런 식으로 캔다면 [[김영삼]], [[김대중]]인들 온전하겠는가? 적당한 선에서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야당의 태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모처럼 마련된 이러한 좋은 상황이 파국으로 흐를 수도 있다."로 상당히 강경한 발언이었다.]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발언자는 김진영으로 추측되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김진영은 군 내 기반이 두터운 만큼 노태우는 김진영을 후순위로 두고 다른 전두환계들부터 차근차근 제거하기 시작했다. 6월에 전두환계 육군참모총장 [[박희도]]가 해임됐고 12월에 전두환계 보안사령관 최평욱이 좌천당했으며 결국 1989년 3월 김진영도 수도방위사령관에서 쫓겨나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2번째 좌천길에 오른다. 다시 눈물밥을 먹는 동안 17기 동기 [[이문석]]이 노태우의 직계 군맥으로 중용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더니 자타공인 17기 최선두 주자 김진영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사조]]처럼 김진영은 [[부활]]했는데 6개월 뒤 2차 진급으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 오른 것이다. 비록 1군사령관을 거머쥔 이문석에 비해 뒤쳐졌지만 대장 진급에 성공함으로써 '왕년의 김진영이 돌아왔다'는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간신히 육군참모총장으로의 길을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덧 임기 말에 접어들던 노태우는 퇴임 후를 생각했는지, 분열된 하나회[* 전두환계 하나회에 대한 숙청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에서는 전두환계 하나회와 노태우계 하나회 간의 권력에 대한 암투가 벌어졌다.]를 수습하려 했는지 전두환계 하나회와 노태우계 하나회의 조화를 도모했다. 하나회와 군 내에 기반이 두터운 김진영을 버리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 같고 강직하던 김진영 역시 이 때는 눈물밥 2번 먹고 사람이 유해졌는지 노태우에 대한 [[충성]] 의사를 밝혔다고도 전해진다. 이후 이문석과의 육군참모총장을 둔 경쟁에서 마침내 승리하며 1991년 말 제29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노태우는 비록 이문석이 자신의 직계였지만 김진영을 버리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전임 육군참모총장이 노태우 직계인 [[이진삼]]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맥]]이 군을 독점하고 있다는 비판을 신경썼다는 의견이 있다.] 무엇보다 육군참모총장 인사를 앞두고 하필 이문석이 [[암]]에 걸렸는데 극비리에 [[수술]]을 받았고 초기 암이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은 무리가 되었다. 이진삼과 이문석 모두 일단 군을 떠난 뒤 대신 장관으로 [[내각]]에 입각했다. 이렇듯 반란 직후만 해도 순탄하게 육군참모총장이 될 것 같던 김진영은 2번이나 좌천을 이겨내고 파란만장하게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지만 숙청탄 1발이 남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