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덕 (문단 편집) == 생애 == [[1903년]] [[6월 6일]]에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일명 리덕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국]] 동녕현 석고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1929년]] [[10월]], 중국 [[혁명]]에 투신하였으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흑룡강성]] [[밀산]]에서 반일유격대에 가담, [[동북항일연군]] 산하 4군에 참여하여 북만주에서 싸웠다. [[1934년]]에 [[중국 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 [[1937년]]에 [[졸업]]하고 [[1938년]]에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방호산, 진반수, 림해, 박훈일, 리림, 전우, 장복, 리권무와 함께 [[연안]]으로 [[파견]]되어 [[중일전쟁]]에 참가하였다. [[1940년]]에 연안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을 졸업하고 [[중공중앙]] 경호연대 [[분대장]]으로 배치되어 [[마오쩌둥]]을 [[경호]]하였다. [[중일전쟁]] 종료 이후에는 [[국공내전]]에 참여, [[1945년]] [[11월]]에 [[조선의용군]] 3지대 부지대장이 되었다. [[1946년]] [[4월 28일]],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하얼빈 [[점령]]에 참여하였으며 [[하얼빈]]에서 3지대 병력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6년]] [[가을]]에 기존 지대장 [[리상조]] 등이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신임 조선의용군 3지대장에 임명되었고 장춘 [[전투]]에서 [[국부군]]과 교전하였다. [[1948년]] [[11월]], 3지대가 [[장춘]] 점령을 위해 [[독립]] 11사단에 편입되면서 독립 11사단 [[부사단장]]이 되었다. 장춘 점령 이후 [[1949년]] 초 중공중앙의 [[명령]]에 따라 독립 11사단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 164사단으로 개편되면서 부사단장에 유임되었다. 1949년 [[8월 23일]], 164사단 산하의 [[조선인]] 부대 1만명을 이끌고 [[회령]]을 통해서 귀국, [[나남]]에 주둔하여 그대로 [[조선인민군]] 5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고려인 유성철은 원래 김창덕이 무능하다는 평이 많았으나 자신이 추천해준 덕분에 5사단장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의 반격으로 [[강계]]까지 후퇴한 이후 [[김일성]]으로부터 [[후퇴]]를 조직적으로 잘했다고 치하받았다 [[카더라]]. [[1950년]] [[11월]], 8군단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최고사령부 경무국장, 서해방어사령관 등으로 재직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5년]]에 연안계 동료인 [[방호산]], [[박일우]] 등이 숙청당했지만 김창덕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김일성은 김창덕은 [[반동]] 박일우에 맞서 잘 투쟁했다고 오히려 [[칭찬]]하며 그를 보호해주었고 김창덕은 동료들 [[사냥]]에 참여했다. 덕분에 [[총참모부]] 간부국장, [[총정치국]] 규율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민족보위성 국장에 임명되었다.민족보위성 국장 시절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경험이 조선인민군의 혁명전통이라고 김일성 숭배 활동을 벌였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북한)|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북한)|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1917)|유성철]], [[최광]],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8년]] 11월과 [[12월]]에 있었던 김일성의 중국 방문 때 [[김광협]], [[허봉학]], [[지병학]], 장서환, 장봉진과 함께 군사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959년]] 1월에 검열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며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고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연안계를 [[토사구팽]]하는 과정에서 [[1964년]] 4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소환되었고 [[1967년]] 4월에 국가검열성 부상을 거쳐 [[황해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가 그나마도 [[1969년]] 5월에 해임되었다. 북한에서는 '휴식하였다'라고 하는데 토사구팽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 싶다. 김영순은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에서 김창덕이 [[평성]]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쫓겨났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중국에 잔존한 연안계 생존자들은 제일 무능하고 늙은 놈이 유일하게 제명에 죽었다고 씹었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1988년]] [[5월 24일]]에 [[사망]]했다. 그래도 김일성 편을 계속 들은 것이 참작되었는지 복권되어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항일혁명렬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